▲김비아
경내를 벗어나 나무 의자에 앉아서 김밥을 먹는다. 집을 나서며 어머니에게 "엄마, 안 바쁘면 집에 있는 재료로 김밥 한 줄만 대강 말아줄래요?"라고 말했는데, 어머니는 주저 없이 내 부탁을 들어주셨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먹으며 생각한다. 효자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안 해도 될 온갖 고생을 사서 하며 자녀 셋 키워내느라 껍데기만 남은 어머니의 삶.
이제 오십 중반을 넘은 어머니의 변화는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자식 키우는 일에 보람을 걸고 살던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요즘 점점 페미니스트로 변하고 있다. 자녀들이 각기 제 갈 길로 가고 있는 지금,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은 지금, 그 무엇도 어머니의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뒤늦게 발견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 잘 되는 게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내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다고, 수녀님들의 삶이 값져 보인다고 하신다. 자식만 바라보고 산 시간의 10분의 일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며 살았어야 한다고…. 남편도, 자식도 다 소용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고….
다시 태어난다면 제대로 공부해서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치고 싶으시단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개개인의 윤회를 그다지 믿지 않지만 어머니의 그 소박한 소망을 들을 때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며칠 전 어머니는 검정고시를 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이에 수학이 머리에 들어오겠냐며 걱정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욕구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대개 사람들이 식구들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애증'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을 때 사랑만이 남는다. 한때 우리도 참 많이 싸웠었다. 그러나 서로를 인정하는 지금, 내 어머니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성이다.
희귀 동식물 보호를 위해서 운문사에서 운문산으로 오르는 길은 진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운문산 자연휴양림으로 발길을 돌릴까 하며 북동편 산자락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저 산 높은 곳에 암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안내판을 보니 운문사에는 암자가 넷 있었다.
방향을 보아하니 북대암일 것 같았다. 북대암으로 가는 길 입구는 차가 갈 수 있는 포장도로였지만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경사가 꽤 급한 시멘트 길을 걷는데, 계곡 물소리가 주위를 온통 휘감는다. 흙길이면 더욱 좋겠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을 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으리라. 한참 올라가다 보니 저 아래 운문사가 내려다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