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산책, 긴 여운

운문사에서 잠시 머물며

등록 2004.08.24 16:22수정 2004.08.24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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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으로 쏟아지는 비에 연이은 흐린 날씨는 지리산으로 가려 했던 나의 발을 묶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청도 운문사로 방향을 돌렸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소나무 터널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이 솔숲길을 걸어갔으면 더 좋으련만 차로 지나치게 됐다.


김비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담을 따라 걷는다. 담 안으로 보이는 절은 주위를 둘러친 산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하다. 운문사는 신라 때 창건된 천년고찰로 고려조에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주지로 머물기도 했으며, 지금은 승가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김비아
오륙년 전에도 이곳에 한 번 간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운문사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기에 특별한 인상이 남지 않았다. 아마 가까운 친구에게 "거기 별로 볼 게 없다"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제법 살아온 시간이 있기 때문일까. 운문사 경내를 감도는 고요함에 몸을 맡기며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느끼려고 한다. 이 공간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 삶의 부드러운 훈기가 전해 온다.

대웅보전 앞에서 만난 연꽃. 이십 년 가까이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나는 이런 작은 장식이 주는 생명의 느낌에도 마음이 설렌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초를 아무리 정성스럽게 가꾼다 해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고 자라는 풀꽃의 싱그러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게 된다면 제일 먼저 가져다 놓고 싶은 것이다.

김비아
예전 기억이 없으니 바라보는 게 다 새롭다. 아마 여기도 새 집이 늘었으리라.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조화를 깨뜨리는 흉한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낡아 보이는, 그래서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비로전 앞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앞에는 보물로 지정된 두 개의 삼층석탑 이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말하고 있다.


김비아
김비아
내 친구 하나는 시간은 망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시간은 분명히 존재하며, 흘러가고 있기에…. 물론 영원의 빛 앞에서 시간을 바라본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찰나처럼 덧없는 것이다. 그러나 찰나일지라도 시간은 분명히 존재하며 흘러간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영원 속으로 떠날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있을 때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은 가능성과 창조의 시간이다. 나날의 삶이 새로운 창조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죽을까봐, 생을 엉뚱한 것에 소모하고 말까봐 나는 때로 두렵다.


목을 축이기 위해 약수터를 찾으니 글발 하나가 내게 인사한다. 이 말을 전한 사람이 품었을 고뇌와 그가 지녔을 평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영원을 향한 끝없는 갈증을 품고 있는 것일까.

김비아
낮 12시, 경내를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다. 스님이 타종을 하는 모습이 보여 다가갔다. 종을 몇 번 울린 스님은 조용히 사라진다. 운문사는 비구니 스님들만 거처하는 절이었지. 그래서인가 보다. 절 안을 감도는 이 따스함의 정체는….

김비아
경내를 벗어나 나무 의자에 앉아서 김밥을 먹는다. 집을 나서며 어머니에게 "엄마, 안 바쁘면 집에 있는 재료로 김밥 한 줄만 대강 말아줄래요?"라고 말했는데, 어머니는 주저 없이 내 부탁을 들어주셨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먹으며 생각한다. 효자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안 해도 될 온갖 고생을 사서 하며 자녀 셋 키워내느라 껍데기만 남은 어머니의 삶.

이제 오십 중반을 넘은 어머니의 변화는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자식 키우는 일에 보람을 걸고 살던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요즘 점점 페미니스트로 변하고 있다. 자녀들이 각기 제 갈 길로 가고 있는 지금,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은 지금, 그 무엇도 어머니의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뒤늦게 발견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 잘 되는 게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내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다고, 수녀님들의 삶이 값져 보인다고 하신다. 자식만 바라보고 산 시간의 10분의 일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며 살았어야 한다고…. 남편도, 자식도 다 소용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고….

다시 태어난다면 제대로 공부해서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치고 싶으시단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개개인의 윤회를 그다지 믿지 않지만 어머니의 그 소박한 소망을 들을 때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며칠 전 어머니는 검정고시를 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나이에 수학이 머리에 들어오겠냐며 걱정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욕구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대개 사람들이 식구들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애증'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을 때 사랑만이 남는다. 한때 우리도 참 많이 싸웠었다. 그러나 서로를 인정하는 지금, 내 어머니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성이다.

희귀 동식물 보호를 위해서 운문사에서 운문산으로 오르는 길은 진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운문산 자연휴양림으로 발길을 돌릴까 하며 북동편 산자락으로 눈길을 돌리는데, 저 산 높은 곳에 암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안내판을 보니 운문사에는 암자가 넷 있었다.

방향을 보아하니 북대암일 것 같았다. 북대암으로 가는 길 입구는 차가 갈 수 있는 포장도로였지만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경사가 꽤 급한 시멘트 길을 걷는데, 계곡 물소리가 주위를 온통 휘감는다. 흙길이면 더욱 좋겠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을 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으리라. 한참 올라가다 보니 저 아래 운문사가 내려다보인다.

김비아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펴들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아마 한 시간이 채 못 걸렸으리라. 넓은 길이 어느새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로 바뀌었고, 마지막 돌계단을 오르자 북대암이 나타났다.

암자만 호젓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옆에 스님들이 거처하는 살림집과 작은 정원이 딸려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큰 규모다. 하지만 북대암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괜찮았다. 그리고 비탈을 이용해 만든 아기자기한 꽃밭과 잔디밭을 보니 비구니 스님들은 역시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성은 삶에 아름다움과 생기를 불어넣는 능력이 있다. 삶을 가꿀 줄 아는 것이다.

김비아
내려오는 건 금방이었다. 절 앞으로 난 돌다리를 건너며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흐르는 그 물에 마음을 씻어 건지며, 나는 맑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오는 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홀로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더욱 잘 느낀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는지를, 그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마르틴 부버가 말한 대로 상대를 이용 가치가 있는 '그것'이 아니라, '너'의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 그것은 사랑이다.

살아갈수록 삶에 대한 믿음은 더욱 튼튼해지는데 오히려 마음은 점점 메말라가는 게 아닌지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내게 사랑이 부족함을 느낀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거침없는 사랑의 힘을 일상으로 불러들이고 싶다. 사랑에서 솟아나는 아름다움과 활력으로 모든 시간을 비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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