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500여 리 달린 섬진강이 머무는 곳, 전남 광양 금호도·태인도

등록 2004.08.23 20:26수정 2004.08.2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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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가 살고 누치와 참게가 서식하는 섬진강. 지리산 골짜기를 등지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사는 이곳, 전남 광양 금호도·태인도 일대의 주민들은 갱조개를 잡거나 홀치기로 은어를 잡고, 또 통발로 참게를 잡으며 살고 있다.


광양만은 지리산과 백운산 산골 뭍 생명들의 염원을 안고 550리를 달려온 섬진강이 만들어낸 생명의 갯벌이다. 섬진강의 풍부한 영양 염류에 의해 만들어진 광양만은 일찍부터 수산물 양식의 최적지로 다양한 고기가 알을 낳고 자라는 황금어장이었다.

섬진강 하구는 태인도, 금호도, 갈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자리하고, 좌우로 여수반도와 남해도가 방파제처럼 큰 파도를 막아주고 있어 좋은 갯벌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a 섬진강에서 갱조개를 잡고 있는 주민.

섬진강에서 갱조개를 잡고 있는 주민. ⓒ 김준

식민지 시기 전국 최대의 해태 생산지

우리 나라 수산물 중 최초의 양식 작물은 ‘김’ 즉 해태(海苔) 양식일 것이다. 근대적인 양식업은 수산업 수탈과 일본의 어업 이민을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섬진강 하구 태인도와 금호도 앞 갯벌은 수산시험장을 설치해 해태양식, 석화양식 등 양식업 발달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해태 양식 기술의 보급과 관리를 위해 1911년 광포(지금 광영)에 ‘수산해태전습소’가, 1922년에는 망덕에 ‘광양해태조합’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당시 광양만이 얼마나 황금어장이었는가는 한국수산지(3권, 1910)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광양의 물산은 쌀, 면화, 철기, 식염, 해태 등이며, 이중 특히 면화와 해태가 으뜸이다’라고 적고 있다. 수산물로는 ‘해태 외에 뱀장어, 새우, 농어, 가오리, 서대, 대합, 석화 등 다양한 어패류가 포획되었다’고 한다.


광양 갯벌은 전국 최고의 해태 생산지이며, 일본인 어부들에 의해 뱀장어가 포획되기도 하였다. 해태는 지금의 광양읍, 골약동, 중마동, 광영동의 바다와 접한 마을에서 양식되었으며, 뱀장어를 잡는 철이면 활어 보관 장치를 한 수십 척의 일본 배들이 구마모토, 히로시마 등에서 건너와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에 머물렀다. 광양제철이 들어서면서 해태양식은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뱀장어, 농어, 가오리 등은 지금도 잡히고 있다.

a 섬진강 하구, 오른쪽 백사장이 광양 태인동, 왼쪽은 진월면 망덕포구, 맞은 편은 경상남도 금성면이다.

섬진강 하구, 오른쪽 백사장이 광양 태인동, 왼쪽은 진월면 망덕포구, 맞은 편은 경상남도 금성면이다. ⓒ 김준


a 식민지 시기 광양군 해태 개량 실습 모습.

식민지 시기 광양군 해태 개량 실습 모습. ⓒ 전남 100년 사진자료집

앞으로 이 바다풀을 김(金)으로 부르도록 하여라


김은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으며, 양식되었을까. 1420년대 쓰여진 <경상도지리지>에는 ‘해의’가 지방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남도 광양군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산학으로 평생을 바친 정문기 박사는 <조선의 수산>이란 책에서 조선의 김 역사는 이백 년 전 전남 완도에서 방렴(方廉)이란 어구에 김이 붙어 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양식한데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의 유래와 관련해 완도설도 있는데, <완도군지>에는 전라남도 조약도에 사는 정시원이 어전(漁箭)에 김이 부착한 것을 보고 양식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또 광양설의 경우, 인조시대(1623-1649)에 전라남도 광양군 태인도에 김여익이라는 어부가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지주를 세워 김을 처음으로 양식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김여익은 조선 선조 39년(1606년)에 출생하여 현종 원년(1660년)을 일기로 세상을 마친 사람으로, 인조 18년(1640년) 영암 학산에서 광양 태인도에 들어와 궁기마을에서 최초로 해의를 양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태 혹은 해의가 ‘김’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광양이 해태의 시식지(始殖地)인 것과 관련 있다. 광양 김이 특산품으로 왕실에 바쳐졌는데, 하루는 왕이 광양 김에 맛있게 수라를 마친 후 음식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한 신하가 “광양 땅에 김 아무개가 만든 음식입니다”라고 아뢰자, 임금이 “그럼 앞으로 이 바다풀을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김’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고 분부하여 ‘김’되었다고 전해진다. 광양 태인도에는 그 어부가 김여익으로 알려져 있다.

광양시 태인동 궁기마을에는 김여익을 모시는 영모재가 있다. 1714년 광양현감 허담은 김여익을 추모하고 김양식 보급에 대한 업적을 기린 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비석은 없어지고 비문만 영모재에 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1987년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이후 1992년에 김시식 전시관이, 1999년에 용지마을 입구에 김시식지 유래비가 건립되었다.

a 김시식 전시관

김시식 전시관 ⓒ 김준


a 김시식지 유래비

김시식지 유래비 ⓒ 김준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

김은 우리 나라 서·남해안, 제주도, 일본, 중국 등에 분포되어 있으며 17세기부터 채취가 시작되었다. 1920년대 말 양식 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에 인공채묘기술의 발달과 망홍(網篊, 김발)의 보급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김 양식은 생산량, 소득, 수출, 종사자수 등으로 볼 때 우리 나라 양식어업 중 가장 비중이 높다. 특히 수산업이 기업이나 특정인에 의해 대규모로 생산되거나 어획되는 것과 달리 김은 많은 어민들이 직접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어촌마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광양제철이 들어서기 전까지 금호도와 태인도 일대는 해태양식 외에 꼬막, 피꼬막, 새고막, 바지락 등 패조류를 많이 생산하였다. 현재 제철소가 들어선 450여만 평은 모두 김 양식을 했던 곳이다.

a 광양갯벌에서는 1970년대 후반까지 섶양식으로 김을 생산했다.(광양시문화원, 동광양시마을유래와 주민생활, 1994)

광양갯벌에서는 1970년대 후반까지 섶양식으로 김을 생산했다.(광양시문화원, 동광양시마을유래와 주민생활, 1994)

이곳의 김 양식은 ‘섶(홍죽)양식’으로, 지주식 망홍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까지 지속된 독특한 양식법이었다.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섶양식은 경남 하동, 화개, 산청 등지에서 가져온 홍죽을 상인들에게 구입하여 여름 장마철이 지나면 4, 5개의 가지를 묶어 한씨(사리,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질 때)가 되면, 갯벌에 꽂아 양식을 했다. 지금은 광양제철 부지로 변했지만 새발등, 세녀등, 복해등, 와우, 길호, 하포 앞의 광활한 간석지는 모두 김밭이었다.

a 김을 뜨는 모습(광양시문화원, 동광양시마을유래와 주민생활, 1994)

김을 뜨는 모습(광양시문화원, 동광양시마을유래와 주민생활, 1994)


a 김을 말리는 모습(광양시문화원, 동광양시마을유래와 주민생활, 1994)

김을 말리는 모습(광양시문화원, 동광양시마을유래와 주민생활, 1994)

채취한 김은 큰 둥어리에 담아 공동우물에서 갯벌과 짠물을 씻어낸 다음 짧게 토막을 내어, 손으로 김발을 떠서(쌀 됫박 같은 기구로 사각의 김 원료를 한지를 뜨듯이 얇게 뜨는 것)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말린다.

김 뜨는 작업은 여자들에 의해서 동이 틀 무렵까지 4∼6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그리고 남자들과 아이들은 날이 새면 논이나 밭두렁의 양지, 혹은 대나무 가지에 김발을 널어야 했다. 한참 바쁜 철에는 식사도 거르며 삶은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고 물때에 맞춰 김을 채취하기 위해 갯벌로 다시 나가야 했다.

김(金)대신 금(金)에 기대어 사는 삶

광양만에 기대어 사는 어민들은 물론 갯벌도 이곳이 포항제철 이후 제2제철 부지로 선정되면서 큰 변화를 겪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포항제철 건설 이후 중화학공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어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금호도 전체와 태인도 앞바다 일대 450만 평을 제2제철 입지로 선정하고 중화학공업을 이어갔다.

당시 광양만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는 한국의 대표적인 김 양식지역으로 주민들은 김양식과 자연산 패류를 채취하면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1982년을 기준으로 금호도는 298호 중 213호가, 태인도는 558호 중 500호가 어업에 종사할 정도로 어업비중이 높았다.

김 양식을 통한 소득만 1년에 평균 600만원 이상이었으며, 개별적으로 이루어는 어패류 채취를 통한 소득까지 포함하면 가구당 소득은 연간 1000만원에 이르렀다.

a 제철과 바다.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모두 김 양식장이었다.

제철과 바다.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모두 김 양식장이었다. ⓒ 김준

광양제철 건설이 국책사업으로 추진되면서 정부는 주민 생활의 변화를 강요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주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주민운동은 양식어장과 생활터전을 내주고 집단이주를 해야 하는 금호도 주민, 김 양식장을 잃은 태인도 주민, 김 양식어장에 피해를 입은 하동군 금남면 주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당시 150여 가구가 살던 광영1구에 집단이주지가 마련되어 금호도 주민들이 집단이주하였으며, 연관산업단지 조성으로 어장을 잃은 태인도 주민들은 보상 후 일부 외지로 이주하였지만 80%는 남아 있다.

이들은 광양제철에 우선적으로 취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장을 잃은 후, 제철노동자로 취업하거나, 노동자를 상대로 장사를 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태인도에서 김 양식을 하다 지금은 식당을 운영하는 김아무개(70)씨는 이러한 변화를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태인도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고용을 하니까 안 나가제. 현장에 많이 댕겨. 현장에 가면 한 달에 200만원 정도 하니까. 바다 일처럼 평생은 못허제. 바다 일은 정년이 없으니까. 거기서는 60살 넘으면 눈치를 보기 시작하제.

김은 보상 다 받았제, 충분한 보상은 아니지만. 앞에 있는 것이 금호도, 몇 개 섬이 없어졌어. 무인도도 어장은 다 있었제. 고기가 안 나는 것이 없어, 가을에 전어 많이 잡고, 깔따구, 농어 없는 것이 없었어, 가오리도 잡지 주낙으로.

여기도 다 갯벌이고, 김 양식장이여, 여그(태금 1구)는 괜찮은데 2구는 제철에서 냄새가 심해."

a 갯벌 모시조개를 저장하고 나오는 주민.

갯벌 모시조개를 저장하고 나오는 주민. ⓒ 김준

갯벌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금호도와 태인도를 잇는 다리 아래로 아직 갯벌이 제법 남아 있고 작은 배들이 줄지어 묶여져 있다. 대나무 울타리를 경계로 수십 조각으로 나누어진 갯벌 갯벌은 바닷물이 작은 갯골을 넘기 시작하면서 보석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오후 3시 무렵 나이가 들어보이는 몇 명의 아줌마들이 줄이 달린 플라스틱 함지박을 끌고 갯벌에서 나오고 있다. 태금 2구에 사는 아줌마들이 새벽에 나와 인근 갈도(태인도 인근 하동군 금성면에 위치한 섬)에서 모시조개를 캔 후 이곳에 저장해 놓고 나오는 길이었다.

"물물이 있는데(물이 생기는데). 여그 조개도 먹을 수 있제. 여그는 태인 2구 것이고, 각각 또 나누어져 있제. 모시조개 겨울에 팔려고, 겨울에는 비싸. 저장해 놓은 것이제. 저그 배 타고 갈살등(갈도 모래등)에 가서 캐가지고 와서, 여그 묻어 놓은 것이어. 도망안가. 자기 밭이제."

남자들은 대부분 제철에 일 나가고, 여자들은 농사를 짓지만 아직도 갯벌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근 섬진강 하구나 갈도에서 모시조개를 잡고 있다. 제철 일은 정년이 있지만 갯일은 정년이 없다.

단순노무직도 나이가 많아지면 눈치가 보이고 그만두어야 한다. 젊은 시절 김(金) 양식업으로 몫돈을 만지며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생계를 꾸리던 사람들. 늘그막에 제철(金)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갯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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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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