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물고기를 느끼고 왔습니다"

비 내리던 날 부산 금정산 범어사 탐방기

등록 2004.08.25 18:11수정 2004.08.2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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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 밖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척이며 깊이는 7촌 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산 이름을 금샘 ‘금정(金井)’이라 하고, 절 이름은 ‘하늘나라의 고기’를 뜻하는 ‘범어(梵魚)’라고 지었다. - 동국여지승람 ”



a 부산 금정산 범어사 _ 대웅전

부산 금정산 범어사 _ 대웅전 ⓒ 이인우

지난 주말(8월 22일) 부산을 비롯한 남부지방은 태풍의 영향으로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오랜만의 부산여행에 반갑지 않은 태풍 소식은 나의 여행 일정을 더욱 재촉하게 했다. 예정보다 일찍 숙소를 나선 나는 우선 범어사로 향했다. 그동안 서너 차례 부산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지만 금정산 범어사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이번 여행에는 반드시 가보리라는 다짐을 했던 터라 비가 내리는 날임에도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범어사로 향했다.

a 범어사의 템플스테이에 참가하고 있는 외국인 신도들

범어사의 템플스테이에 참가하고 있는 외국인 신도들 ⓒ 이인우

마침 이날은 음력으로 칠월 칠석이라 굵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을 찾는 신도들도 꽤 있었다. 특히 연세 드신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가족을 위해 절을 하는 분들이 많아서 어머님의 깊은 가족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절을 찾은 탓에 나는 일주문을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사찰 대웅전 아래까지 단숨에 올랐다. 차에서 내려 도로를 걷는데 산 위에서 내려오는 빗물이 발목까지 찰만큼 세차게 흘러내렸다. 우산도 없이 배낭을 메고 내린지라 사찰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카메라를 가슴에 품고 빠른 발걸음으로 대웅전까지 걸어갔다.

a 보물 제 250호로 지정된 범어사 3층 석탑

보물 제 250호로 지정된 범어사 3층 석탑 ⓒ 이인우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대웅전에는 이미 많은 신도들이 칠월칠석을 맞아 특별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절을 찾는 신도들은 모두 대웅전 앞마당 3층 석탑에서 기도를 하거나 그 옆의 미륵전을 향해서 기도를 한다. 또 비로전과 관음전을 향해서도 합장을 한 후에 대웅전으로 향했다.


범어사는 약 1300여 년전 신라 문무왕 18년(서기 678)에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해동의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사료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화엄십찰이 대개 그렇듯이 범어사 역시 국방의 목적도 겸한 전략적 사찰이었다. 왜구들이 동해안을 침범하여 신라를 위태롭게 할 즈음 금정산 밑에 범어사를 세우니 왜구들이 물러갔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a 독성각 _ 1905년 건립된 건물로 아치구조의 입구가 이채롭다.

독성각 _ 1905년 건립된 건물로 아치구조의 입구가 이채롭다. ⓒ 이인우

a 독성각 입구의 아치문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상

독성각 입구의 아치문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상 ⓒ 이인우

사찰마다 가장 규모가 크고 소중하게 보존되는 곳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대부분이 대웅전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범어사에서 나의 시선이 유독 오랫동안 머문 곳은 대웅전이 아닌 둥근 문이 인상적인 팔상전과 독성각, 나한전이 있는 건물이었다. 특히 독성각 입구의 문 모양은 동그랗게 만들어져 보는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그곳에 조각된 섬세한 무늬는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누르게 했다.

팔상전, 독성각, 나한전 등이 함께 모셔진 이 건물은 1905년에 건립됐다는 안내 표시가 매우 소박하고 간소하다.

내가 범어사를 찾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꼭 한번 찾아봐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다른 사찰과는 다른 구조를 가진 범어사의 일주문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택시를 타고 오는 바람에 일주문을 지나쳐 와서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대웅전 등 사찰의 건물들을 들러보고 비를 맞으며 다시 일주문으로 향했다.

a 범어사 일주문 _ 부산시 유형문화제 2호 _  3칸 일주문으로 여느 사찰과는 다른 모습이다.

범어사 일주문 _ 부산시 유형문화제 2호 _ 3칸 일주문으로 여느 사찰과는 다른 모습이다. ⓒ 이인우

a 일주문 앞의 하마비 _ 말에서 내려 걸어서 사찰에 오르라는 표석

일주문 앞의 하마비 _ 말에서 내려 걸어서 사찰에 오르라는 표석 ⓒ 이인우

일주문 앞에 도착하니 일주문 지붕 밑에는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이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는 비를 피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빨리 자리를 비켜주길 기다리며 하마비(下馬碑) 앞에서 카메라를 가슴에 품은 채 한동안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나는 한참만에야 비 내리는 범어사 일주문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a 일주문의 돌 받침대

일주문의 돌 받침대 ⓒ 이인우

범어사 일주문은 여느 사찰과 달리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칸으로 나눠 있다. 둥글고 긴 4개의 초석 위에 짧은 두리 기둥을 세우고, 겹처마의 맛배 지붕을 올렸는데 이러한 구조는 범어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다.

이와 함께 범어사 진입로는 입구에서 보제루까지 이르는 동안 일주문과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면서 아주 조금씩 방향을 오른쪽으로 향하면서 뻗어있다. 이는 긴 거리의 직선에서 오는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한 배려이다. 자로 잰 듯한 칼날과 같은 진입로가 아닌 조금씩 방향을 틀면서 진입로를 배치한 옛 선인들의 건축학적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a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의 낮은 계단 풍경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의 낮은 계단 풍경 ⓒ 이인우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으로 이르는 길은 그 거리가 20여 미터정도 되는 짧은 거리로 굽어 있지만 곧아 보이고 나지막한 계단이 계속된다. 카메라를 수평에 놓고 이 풍경을 찍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저 내 눈이 느끼는 마음의 수평계를 통해 카메라에 담아야 할 것이다.

나의 범어사 방문은 태풍으로 인해 우중 감상의 시간이 됐다. 범어사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그동안 수많은 책 속에서 읽었던 범어사의 사찰이야기와 창건 설화는 잊은 채, 단순히 눈에 보이는 범어사의 겉모습만을 보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다.

a 사찰의  검은 기와지붕위로 멀리 보이는 산 등성이의 비구름

사찰의 검은 기와지붕위로 멀리 보이는 산 등성이의 비구름 ⓒ 이인우

카메라에 물이 들어갈 것을 걱정한 나머지 범어사의 아름다운 곳곳을 둘러보지 못했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들을 보지 못했다. 다음에는 날씨 화창한 날에 범어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범어사 일주문을 나왔다.

물고기는 물이 있어야 산다. 아니 물속에서 산다. 난 그렇게만 생각했다.

태풍으로 많은 비가 내려 범어사의 진입로에는 물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그곳에는 내가 찾던 '하늘물고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찾는 그 하늘물고기는 아침 일찍부터 빗속을 헤쳐 절을 찾아 가족을 위해 합장하는 우리 어머님의 마음속에 있었나 보다. 하늘물고기는 그곳에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늘물고기'는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보려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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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그리고 조선중후기 시대사를 관심있어하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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