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리는 결코 무인도로 갈 수 없다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4.08.26 12:03수정 2004.08.26 14:5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보길도 인근의 작은 섬
보길도 인근의 작은 섬강제윤

세상이 싫어 백이 숙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다 죽었다
나도 아주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가고자 하나
나는 이제 산으로 갈 수가 없다
산나물이나 뜯고, 버섯이나 따고, 산 과실이나 따먹으며
산에 살고자 하나 나는 결코 산으로 갈 수가 없다
산마다 주인이 있어, 누가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돋아나는 나물 한 포기
버섯 하나마다 주인이 있어 나는 그것들을 뜯어먹고 살 수도 없다
이제 나에게는 먹다 죽을 고사리도 없다


나는 아주 세상을 등지고 바다로 가 살고자 했다
무인도에 들어가 해초나 뜯으며 살다 가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바다로 갈 수가 없다
무인도에 들어가 살수도 없다
무인도에도 주인이 있어, 바다에도 주인이 있어 저절로 갯바위에 붙어 자라는
미역이나 다시마, 톳에도 주인이 있어, 나는 그것들을 따먹고 살수도 없다
나는 무인도의 미역을 뜯어먹으려다 그것을 독점해 이득을 챙기는 자들에게 쫓겨났다
나는 무인도의 톳을 뜯어 목숨을 연명하려다 섬 밖으로 내팽개쳐졌다
나는 무인도에서 목숨을 이어갈 수가 없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무인도로 갈 수 없다
우리는 결코 무인도에 갈 수가 없다
진실로 이 땅에는 숨어 살 곳이 없다
진실로 이 땅에는 돌아 갈 곳이 없다
돈이 싫어 가난하게 살고자 하나 돈 없이는 가난하게 살 자유조차 없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4. 4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5. 5 "10만4천원 결제 충분히 인식"... 김혜경 1심 '유죄' 벌금 150만원 "10만4천원 결제 충분히 인식"... 김혜경 1심 '유죄' 벌금 150만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