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를 넘어선 영웅 등소평

등록 2004.08.26 23:41수정 2004.08.27 17:27
0
원고료로 응원
1. 등소평 이후의 중국

사람들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모여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모여살다 보니까 그 속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고, 그와 더불어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도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시간은 흘러왔고,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 속에는 좋은 것들도 있고, 슬프고,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 - 전쟁이나 핵무기 같은 - 도 있지만, 그래도 영웅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기에 우리는 이 시대를 보다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제도라는 것을 만들었다. 또한, 이 제도를 묶을 수 있는 이념이라는 것도 만들었다. 그래서, 제도와 이념이 다른 국가와 집단들끼리 대적하고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투쟁을 한다. 이러한 각각의 제도 속에서 사람들은 영웅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런데, 그 영웅은 그들이 속한 제도 속에서만 받아들여지는 게 대부분이다. 자신이 속한 제도 안에서 이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을 영웅으로 받아들이기는 사실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다.

이념이 같은 집단에서 영웅이 되는 경우는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념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는 영웅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영웅이라는 개념이 모호하고,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등소평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등소평이란 인물은 사회주의체제에 살면서, 우리와는 다른 이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지만 중국 대륙 밖에서 그를 보고 용기를 얻은 젊은이들이 많이 존재한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내가 등소평이란 인물에 대해서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기억은 중학교 때인 것 같다. 수업을 하던 도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던 중 등소평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등소평이 “그래도(키는 작지만) 10억이 내 발 밑에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면, 배짱좋게 그런 말을 한 등소평에 대한 인상이 꽤 강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때는 등소평이라는 사람을 공산주의 국가의 김일성(현재, 김일성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했듯이 김일성이 최고로 나쁜사람인 줄 알았다. 창조적인 우리의 교육자들 때문에)과 같은 존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등소평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97년 등소평이 죽은 후 발행된 < Newsweek > 지를 통해서였다. 이 잡지의 겉표지에 등소평이 뒷짐을 지고 서 있고, 가운데 큰 글자로 '중국 등소평 이후'라고 씌어 있었다.

등소평 이후의 중국이라…. 중국에 등소평이 끼친 영향이 얼만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등소평이란 인물이 누구이기에 < Newsweek > 지의 반이나 되는 기사를 차지할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당시에는 그 기사를 읽어도 많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그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는데,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사진으로 처음 만난 기억 속의 등소평은 정말 작고 귀여운 사람이다. 하지만, 책을 통해서, 그리고 수업을 통해 알게 된 등소평은 변하지 않는 신념으로 중국을 진정으로 사랑한,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거대한 영웅이었다.

2.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자본주의자

작은 거인, 부도옹(不倒翁), 개혁가, 독재자, 오뚜기. 이 말들은 모두 등소평을 가리키는 말이다. 150cm의 작은 키, 약간은 검은 얼굴, 짧은 목, 언뜻 보기에는 시골 노인을 닮았다.

사천성의 객가 출신. 보기와는 달리 그의 반항적이고 거침없는 언동 때문에 정적(政敵)의 미움을 받아 두 차례나 실각 당했지만, 이러한 불운을 딛고 되살아나 '천하'를 잡았던 인물이다. 당시 76세의 등소평이 뜻을 펴기에는 그가 너무 늙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중국 인민들은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계 어느 기업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시장을 탄생시켰고, 고속경제성장을 이뤄 세계 많은 나라의 부러움을 샀다. 등소평하면 개혁, 개방과 더불어 ‘고속경제성장’이란 단어가 떠오르게 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는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성공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이념이라는 것이 증명된 시대인 것 같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시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본주의자로 성공한 사람이 록펠러나, 포드, 또는 빌 게이츠가 아니라 모택동의 혁명군 군사로 출발하여, 숨을 거두는 날까지 공산주의자임을 자처한 150cm의 단신 등소평이라는 사실은 이 시대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한다.

78년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등소평은 공산주의 이념보다 경제 건설을 우선하는 개혁, 개방 정책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변하면서 중국이 달라지고 세상이 뒤바뀌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를 떠나지 않고 공산주의자임을 스스로 나타내며 자랑스러워하던 등소평이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모택동이 남기고 간 유산이 크게 작용을 했을 것이다.

1976년 9월 9일에 사망한 모택동이 중국 인민을 상대로 남긴 유산은 국민 1인당 GNP 1백달러, 세계 최빈국(最貧國)의 하나였다. 물론 건국의 아버지로서 중국 인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가시적인 당시의 현실은 '대약진' 정책의 실패와 잇따른 노선투쟁의 결과였다.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은 어느 한 시점에서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59년 4월에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재선된 후 유소기와 함께 경제조정기의 정책을 이끌어 나갈 때, 그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면 그가 실용적인 경제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1961년~1962년에 등소평이 했던 발언들은 모아놓은 것이다.

“현재 생산관계는 긴장되고 있다. 당과 대중과의 관계가 긴장되고, 간부와 대중과의 관 계가 긴장되고, 소유제의 관계가 긴장되고 있다. 최근 3년간 소유제는 파괴되고 적극 성이 파괴됐다. 천재(天災)는 주요한 원인이 아니며 인재(人災)가 주요한 원인이다.”
-1961년 중앙공작회의에서

“우리는 운동이 너무 많다. 그것도 모두 전국적인 것으로 끝까지 관철할 수 없을 것 같 은 생각이 든다.” -1961년 공청단(共靑團) 중앙공작회의에서

“주석이 정세가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정치정세가 훌륭하다는 말이다. 경제정세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렇게 좋지도 않다. -1962 중앙공작회의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식량생산을 늘리는 일이다. 증산만 된다면 단간풍(單幹風․개 인 경영의 농업)이라도 좋다. 흰 고양이거나 검은 고양이거나 쥐를 잡을 수만 있다면 좋은 고양이다.” -1962년 중앙서기처 회의에서 <등소평> 31p~32p

위의 말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등소평이란 사람은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사람이다. 위의 발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의 일관된 태도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반당적(反黨的)이거나 수정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민첩하고 정곡을 찌르는 지시’라는 것이다.

실제로 나중 문화혁명을 통해서 받은 등소평의 '자기 비판서'를 보아도 이런 지시가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살펴보아도 재건(再建)에 열중하는 엄격한 경영자의 자세가 일관되어 있다고 볼수도 있지 않을까?

직설적인 발언과 정확한 시대흐름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던 등소평은 더불어, 옳다고 믿는 일은 확신을 가지고 강력하게 추진해 세계의 많은 석학들에게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자본가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등소평이 만약 이 말을 들었을 때 과연 좋아할지런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등소평은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보통,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이고, 계획경제하면 사회주의라는 등식 같은 논리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붙잡고 있었다. 물론 나도 이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있었다. 하지만 등소평은 그렇지 않았다.

계획경제나 시장경제 체제가 배출해낸, 그래서 그 체제 안에서만 통용할 수 있는 이념의 도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체제를 더 좋은 질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러한 등소평의 열린 생각, 창조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의 모습이 가능한 것 같다.

다음의 인용문은 1991년 1월 28일부터 2월 18일까지 상해를 시찰하는 가운데, 상해시 핵심 간부들과 나눈 담화의 일부이다. 이것을 보면 이러한 등소평의 생각을 확실히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또한, 자신의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무조건적인 수용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수용자로 하여금 스스로 수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납득시키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13억이라는 중국의 인구를 통치하는 통치자로서의 노련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개혁, 개방은 더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 당은 몇십 년 더 강조할 것입니다. 다른 의견들도 있겠지만 그것도 좋은 뜻에서일 것입니다. 첫째로는 습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로는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나 혼자 강조해서는 부족합니다. 우리 당이 강조하고, 몇 십년을 강조해야 합니다. 물론 너무 성급해서도 안 됩니다. 사실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때 농촌에서 가정 단위 농업 생산 청부 제를 실시하자고 제기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청부제도를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납득이 가지 않으니 하지 않고 질질 끌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2년이나 끌면서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다렸습니다.

계획경제라 하면 사회주의고 시장경제라 하면 자본주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다 수단입니다. 시장경제도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할 수 있습니다. 쇄국정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문화대혁명’ 때 ‘풍경호사건’이 있었는데 나는 ‘4인방’과 다투었습니다. 1만 톤짜리 배를 가지고 무슨 허풍을 치느냐고 말입니다.

1920년 내가 프랑스에 가서 유학할 때 5만 톤짜리 외국 우편 선을 타고 갔습니다. 개방을 한 지금 우리는 10만, 20만 톤짜리 배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질적인 변화입니다. 개방은 일관되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나 처음 시험해 보는 사람이 있어야만 새 길을 개척합니다. 처음으로 시험할 때는 실패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상해 인민들의 사상이 더 해방되고 담도 더 커지고 발걸음도 더 빨라지기를 희망합니다. <등소평 문선> 240p~241p


3. 소병자(小甁子)

중국 인민들에게 있어서 등소평이란 인물은 소병자(小甁子)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말은 등소평이 수많은 숙청을 당하고도 재기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150cm에 불과한 그의 작은 키를 함께 암시하는 말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주의에 있어서 주은래와 같은 사람은 정치적 굴곡에 상관없이 항상 선두에 서 있었지만, 등소평은 두 번의 실각이라는 정치적 치명타로 보이는 내리막도 있었다.

이러한 내리막은 유소기뿐 아니라 다른 인물도 가지고 있었고, 이들 모두는 숙청 당했거나 다시는 재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등소평은 이들과 다르게 두 번의 실각이라는 내리막을 딛고 다시 복권(復權)에 성공했을 뿐아니라, 거대한 중국 대륙을 등소평의 색깔로 물들여 놓았고, 누구나 인정하는 중국의 경제적 성공을 이루어 놓았다.

하지만 등소평이라는 이름을 오직 경제적 성공 하나로 제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사랑한 사람이었고, 그것을 발전시켜 세계 제일의 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 믿고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인 것이다.

그는 냉정한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고, 현실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돌파구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음은 1982년 9월 18일 김일성과 함께 사천(四川)을 방문하며 도중에 한 담화의 일부분이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낙후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면 처음 시작하는 첫 단계의 오랜 기간 동안에는 생산력 수준이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낮은 것은 사실이고, 빈궁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반드시 생산력을 힘껏 발전시키고 점차적으로 빈궁을 소멸하여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점차적으로 높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회주의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이겨나갈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즉 공산주의의 고급단계에서는 경제가 고도로 발전하고 물자가 대단히 풍부해져야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산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고서야 경제가 어떻게 발전하겠습니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어떻게 구현시키겠습니까?

우리는 몇십 년간에 걸쳐 혁명을 했고 30여 년간 사회주의를 실행하여 왔으나, 1978년까지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4, 50원에 불과하고, 농촌의 대다수 지역이 여전히 빈곤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우월성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속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모든 사업의 중점을 경제건설로 전환시킬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등소평 문선> 33p


위의 담화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등소평은 당시 낙후한 중국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한 돌파구를 찾을 줄 아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는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확실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생산을 극대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시장경제라는 것을 중국사회에 들여놓은 것이다.

공산주의 이념을 목표로, 보다 완전한 공산사회를 위하여 나아가는 중국이라는 체제 속에다가 시장경제를 접목시키려 한 것은 누가 뭐라해도 등소평의 결단력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의 이러한 결단력은 천안문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등소평의 개혁, 개방이 추진됨에 따라서 개인주의,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 등 공산주의체제에 해로운 가치관이 중국 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89년 개혁 노선 반대파가 불만을 드러냈고 치솟는 물가, 범죄 증가, 부정부패가 초기의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해 봄 수십 만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근 2개월 동안 천안문 광장을 점령하고 정부와의 대화 및 민주주의 확대를 요구했다. 시위자들의 완강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데다 문화혁명式의 혼란을 우려한 등소평은 강경노선을 택했다. 19p


결국 이 천안문 민주화운동은 유혈사태로까지 사건이 확장되고, 개혁가로서 등소평의 명성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곤두박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등소평이 이러한 것들에 흔들리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생각한 목표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등소평의 기억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등소평을 독재자로서 기억하기도 할 것이다.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그의 신념에 기인한 자신감 있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단력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실험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1976년에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에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로 인한 실각(失脚)의 기억 때문에 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그렇게 거세게 대항했을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물론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충분히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체제에 대한 확신과 조국에 대한 자신감 있는 목표, 그리고 공산사회의 이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한 그의 80여 평생의 중국을 향한 사랑만큼은 미치지 못했을 것 같다.

등소평은 당(黨)과 중국의 발전을 위해서 어떠한 것이라도 시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옳다고 믿는 점에서는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과격하기까지 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만한 부분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중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모택동까지도 틀렸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의 말을 보면 등소평의 이러한 면들을 쉽게 볼 수 가있다.

“지도자에 대한 애호(愛護)-이것은 본질적으로 당의 이익, 계급의 이익, 인민의 이익에 대한 애호로 나타나는 것이며 개인의 신격화(神格化)는 아니다.”
-1956년 9월 당장 개정보고


또한, 다음은 이러한 내용과 관련해서 '中國의 改革․開放 加速化와 東北亞秩序'라는 보고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모택동 사망 이후 등소평 등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경제 건설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필요를 갖게 되었고, 이를 위해 개혁, 개방에 장애가 되어온 기존 통치이념에 대한 재평가 작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등소평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모택동 사상이 4대 현대화 정책과 개혁, 개방정책에 대한 이념적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 이들 기본 통치이념이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등소평을 위시한 중국의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맹목적으로 모택동을 신격화했던 과거의 노선에서 탈피하여「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과 「실사구시」원칙에 따라 사상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이를 통해 중국이 모택동 사상등 기존 통치 이념도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므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소평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눈총이나, 자기가 받을 불이익이 아니라 오직 당의 이익과 중국의 발전이었다. 또한, 79년 그가 추진했던 개혁, 개방의 경제조정정책을 보면 61년 경제 조정기에 복권되었을 때, 추진했던 것을 다시 시도해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에는 포기하지 않는 등소평의 신념은, 시대의 흐름과 정치적 상황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감각에 기인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신념을 확실하게 붙들어 주고있는 이유였을 것이다.

등소평이 말하는 정치개혁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보면 당연히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등소평의 경우도 중국을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등소평은 단호히 배격하는 입장을 확실히 하였다. 그가 추진한 「정치개혁」이라는 의미는 민주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중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행정개혁을 의미했다. 그의 목표는 중국의 민주화가 아니라 국력의 증강이었던 것이다. 남들이야 뭐라하든 등소평의 이러한 개인적인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주위에 있던 등소평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러한 등소평의 신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그의 발언과 『中國의 改革․開放 現況과 展望』이라는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정치체제 개혁과 경제체제 개혁은 상호 의존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경제 개혁만을 추 진하고 정치체제 개혁을 소홀히 한다면 경제체제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建設有 中國特色的社會主義」..중에서

....경제개혁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는 정치분야에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여 중국은 지도기구 개편, 행정개혁 및 권력분산등의 조치를 취해왔다.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어디까지나 서방과 같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사회주의 제도를 더욱 완벽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즉, 등소평이 추진한 정치체재 개혁은 근본적이고 제도적인 변혁이 아닌 문혁시대 와해된 당의 기강을 정비하여 경제건설을 효과적으
로 추진하기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중국이 추진해 온 정치개혁은 극히 제한적인 범위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4. 조국을 사랑한 체제를 초월한 영웅

우리들은 우리보다 앞선 사람들이 선택한 체제 안에 살고 있고, 또한 그들에 의해 교육을 받았고, 이 체제에 물들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체제에 사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20세기에 있어서 공산주의가 몰락했고, 자본주의가 성공을 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가장 좋은 형태의 사회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등소평이 추진했던 개혁, 개방이라는 것들에서 자본주의의 냄새가 나기 때문에, 그것은 곧 사회주의의 몰락이라고 바라보는 시선 또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분석일 것이다. 중국 안에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태어나 그의 신념을 키우고, 그의 꿈을 키웠던 등소평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라는 것은 사회주의를 보다 완성시켜 완벽한 공산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렇듯, 우리는 등소평뿐만 아니라 우리와 다른 체제 속에서 그들의 지적능력을 만들었던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그들의 방식대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우리 체제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그들이 경험한 것에 국한시켜 우리 체제를 이해해서는 안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등소평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정말로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하다. 그는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신념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가 속한 체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며,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웠다.

물론, 개인적인 단점들이나 그가 행한 정책에서 야기되는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것들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은 그 인물이 행한 중심적인 일을 보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나는 등소평을 조국을 사랑한 영웅이라고 부르고 싶다. 영웅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또한 그 속에서 그를 보면서, 희망을 가졌던, 혹은 희망을 갖을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면에서 등소평은 체제를 넘어선 영웅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