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리꽃은 늘 땅을 바라보며 피어난다이종찬
그때 나는 복이네 집으로 가서 참나리의 마디마다 마치 흑진주처럼 하나씩 박혀 있는 그 까만 구슬눈을 땄다. 그리고 서둘러 우리집으로 달려와 장독대 옆 조그만 뜨락에 조심스레 심은 뒤 끼니 때마다 물동이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 뜸뿍 뿌려 주었다. 우리집 장독대 옆에도 내가 좋아하는 그 참나리꽃이 예쁘게 피어나는 그날을 학수고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참나리의 구슬눈을 심은 곳을 살며시 파헤쳐 보았다. 구슬눈은 그대로 썪어 있었다. 그중 어떤 것은 마악 싹이 트다가 그대로 말라 비틀어진 것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여름방학 내내 복이네 집에서 참나리의 구슬눈을 따다가 심었지만 구슬눈은 한번도 싹이 튼 적이 없었다.
"쯧쯧쯧~ 쟈는 마음씨도 억수로 착하고 얼굴도 참 이쁜데…"
"아, 낯빤데기(얼굴) 점만 아이모 황진이도 울고 갈 끼야."
"그라이 하늘이 골고루 다 안 주는 기라. 풍년이 들어가꼬 꼬부라진 허리 좀 펼라카모, 고마 우리로 놀리듯이 쌀값이 똑 떨어지는 거맨치로."
"나는 쟈만 보모(보면) 갑자기 맴(마음)이 뒤숭숭해진다카이. 마치 우리 딸내미(딸)라도 되는 거맨치로."
얼굴에 까만 점이 곰보처럼 빼곡히 박혀 있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냥 점순이라고 불렀던 그 누나는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시장통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 점순이 누나의 부모님은 풀빵 장사를 했던가, 설탕 뽑기 장사를 했던가,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는다. 하여튼 무슨 장사를 하면서 퍽 어렵게 살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점순이 누나가 살았던 그 시장통은 우리 이웃마을이었다. 하지만 우리 마을과 시장통 사이에는 제법 넓다란 도랑 하나가 가로 막고 있어서,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또한 시장통에 가려면 벼가 마악 피어나는 신작로를 지나 조그만 다리 하나를 건너야만 했다. 그러니까 점순이 누나가 살고 있는 시장통은 가깝고도 먼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