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배추들이 좋아하겠구먼"

얌체 농사꾼의 무 ·배추 심던 날

등록 2004.09.07 17:54수정 2004.09.0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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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재방송을 하는 드라마 채널을 찾아 TV를 틀어 놓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한바퀴 휘 둘러 봤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연재하는 월간지 마감 날짜에 쫓기지 않고 원고를 미리 써 보자고 한글 화면을 클릭해 놓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시방 뭐하고 있는겨. 배추모 사다 놓고 다 쥑일 참인감?”

기척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 온 옆집 할머니 김경희 여사의 손에는 호미와 모종삽이 들려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습니다. 올해 그 밭에 거기에 콩을 심었다가 새한테 다 빼앗기고 다시 콩을 심을 의욕도 잃은 채 풀밭으로 놔두었습니다. 그 밭을 갈아서 김장거리를 심자고 김 여사가 닦달을 하더니 엊그제는 트랙터 있는 집에 부탁해서 밭을 말끔하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김 여사가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배추 모종을 사다 놓았지요.

시골살이 5년차를 항상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는 농사 일만큼은 초보에 건달을 넘어선 얌체 농사꾼입니다. 텃밭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옆 동네에는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친구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애호박이며 가지 등을 따주는 인심 좋은 이웃들 덕에 굳이 내 텃밭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많이 도는 남편과 아직은 입이 짧은 아이들 덕에 밥상을 차릴 때마다 반찬거리 고민을 덜하기도 하구요.

서툰 나와 연로한 김 여사가 심은 배추.
서툰 나와 연로한 김 여사가 심은 배추.오창경
김 여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호미로 땅을 파서 배추 모종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판에 120개 짜리 모종을 두 판이나 심었습니다.

“배추 30포기만 있으면 김장해서 겨울을 나고도 남을 텐데 너무 많이 심는 거 아닌가요?”
“이게 심는다고 다 배추가 되는 줄 아남? 못 살고 죽는 것도 있고 버러지들 땜에 기 못 피는 것도 있고 두디기(두더지)가 파헤치는 것도 있으니께 넉넉하게 심어야지. 제선네도 이제 김치 냉장고 있으니께 작년에다 대면 안되지 않겄어?”


얼마 전에 원고료를 모아서 김치 냉장고를 장만했다고 나팔을 불고 다녔던 덕에 더 이상 찍소리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배추 240포기를 다 심고 나서 허리를 두드리고 있자니 김 여사가 내 발 밑에 뭔가를 툭 던져 놓습니다.

배추를 심고도 넉넉하게 남은 밭에 이번에는 무를 심자고 하면서 두둑을 만들어야 한답니다. 연로한 김 여사가 쇠스랑으로 두둑을 만드는 법을 시범을 보이는 것을 마냥 지켜 볼 수가 없어서 제가 쇠스랑 자루를 쥐었답니다. 그 일은 배추를 심는 것보다 몇 배나 어렵더군요. 어깨며 허리에 몰려 오는 통증에 숨을 헐떡거리며 2m쯤 되는 밭두둑을 두 개쯤 만들고 한숨을 몰아쉬고 그랬습니다. 전화라도 오면 핑계 김에 주저앉아 쉬기도 하련만 이런 날은 잘 못 걸려오는 전화 한통 없다니까요.


“내가 근력이 좋을 때는 밭두둑도 이쁘게도 만들었는디…. 너무 힘만 들어가니께 모양은 안 나고 골만 깊잖여. 좀 잘 좀 해 보라고.”

내가 만든 밭두둑에 무씨를 심고 왕겨까지 뿌려 놓았다.
내가 만든 밭두둑에 무씨를 심고 왕겨까지 뿌려 놓았다.오창경
내가 만든 밭두둑에 무씨를 뿌리는 김 여사는 제가 난생 처음으로 이런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잔소리까지 해가면서 즐겁게 일을 합니다.

“여기다 알타리 무도 좀 심고 쪽파랑 대파도 좀 심으면 김장거리는 안 사도 될겨. 그나저나 무씨 한 봉다리 갖고는 모지라는디….”

농사 짓고 모시를 짜서 억척 같이 5남매 가르치고도 제금내서(독립시켜) 내 보내는 동안 농토까지 다 팔아치우고 이제는 농사일에서도 손을 놓고 손바닥만한 마당에 화초나 가꾸면서 소일하던 김 여사는 오랜만에 하는 밭일에 신이 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내 땅을 열평이라도 남겨 놨으면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심고 싶은 거 맘대로 심고 그럴 텐디….”

농사짓는 사람들의 땅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이제 텃밭 일에도 힘에 부칠 72세의 김 여사에게도 아직 땅은 미련 덩어리로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무씨를 뿌렸으면 메짜(왕겨)를 덮어야지. 이렇게 놔두면 태풍 분다는디 흙이랑 섞여서 다 날아가쟎여.”

김 여사가 무씨가 부족하다고 어디론가 핸드폰을 하는 것 같더니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득달 같이 나타나셨습니다.

“걱정하덜 말어. 메짜(왕겨) 저기 갖다 논 거 안보여. 무씨 봉다리나 내놓으랑게.”

오랜만에 흙으로 돌아 온 김 여사의 쪽파 심기
오랜만에 흙으로 돌아 온 김 여사의 쪽파 심기오창경
시골 일은 내 일, 남 일이 없습니다. 무씨를 가지고 온 아주머니는 서툰 나와 연로한 김 여사의 김장거리 심기를 못 보겠는지 한참을 입으로 거들고 시범을 보이다 기어코 일이 끝날 때까지 도와주고 갔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태풍의 영향으로 따가운 햇볕 대신에 비를 품은 흐린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서 진땀을 흘리며 땅을 파지는 않은 것은 다행이었습니다. 어거지로 한 밭일이었지만 일을 끝내고 밭을 한번 둘러보니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과 보람으로 가슴이 뿌듯해지더군요.

“뭐하고 있남? 장날인디 장에 갔다 오자고. 이왕 심었으니께 각을 내버려야지(끝낸다는 뜻). 상추하고 아욱 씨도 좀 사고 마늘도 놔야지(심어야지). 농약사에 들러서 농약도 좀 물어보고….”

어느새 말쑥한 차림으로 나타난 김 여사의 채근에 나는 또 하는 수 없이 컴퓨터를 끄고 장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지요. 장으로 가는 길에 마침 차창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배추들이 좋아하겠구먼. 낼 모래면 쪽파는 이쁘게 싹이 날 테니께 보라고.”

밖에는 비가 왔지만 오랜만에 흙으로 돌아 온 김 여사의 얼굴에는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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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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