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야 하겠다

잘못을 내 탓으로 여기는 공부를 다시 해야 하겠다

등록 2004.09.08 05:38수정 2004.09.0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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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애지중지하던 안경을 아내는 열흘 간격으로 못 쓰게 만들어 놓았다. 나는 시력이 안 좋아 안경을 쓰지 않으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운전도 못한다.


열흘 전, 아침 달리기를 하면서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안경을 운동복 주머니에 넣고 뛰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 내가 잠시 쉬고 있는 사이, 아내가 운동복을 그대로 세탁기에 넣고 돌려 안경이 박살나고 말았다. 속이 상했지만 여벌로 쓰고 다니는 안경이 있어 그냥 넘어 갔다.

문제는 오늘 아침. 전 날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고단해서 아침 달리기를 하루 쉴 마음으로 잠시 누워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결에 아내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발로 밟아 다리가 부러진 안경
아내가 발로 밟아 다리가 부러진 안경박철
"아니, 왜 안경을 방바닥에 놓았어요? 아이 참!"

내가 눈을 뜨고 보니 아내가 내 안경을 발로 밟아 안경다리 한쪽이 부러져 있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열흘 사이에 안경 두 개를 못 쓰게 만들다니….

"아니 남의 안경을 발로 밟아 부러뜨렸으면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옳지, 안경다리를 부러뜨려 놓고 한다는 말이 왜 안경을 방바닥에 놓아서 밟게 만들었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열흘 전에도 안경을 세탁기에 넣어 박살을 내고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더니 무슨 심보인지 알 수가 없네? 도대체 당신 왜 그래?"


아이들이 학교에 등교하는 시간이라 더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화를 삭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교동에는 안경점이 없어, 안경을 새로 하려면 하는 수 없이 강화읍까지 나갔다 와야 한다. 한 번 배를 타고 강화읍까지 나갔다 오면 하루가 다간다.

내가 화가 나서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 아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빨리 서둘러서 강화에 나갑시다" 나는 강화읍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화읍내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안경점을 찾아가 안경부터 맞추었다. 아내가 내 기분을 풀어 주려는 것인지 오늘 맞추는 안경은 지난번 내 생일 때, 아무런 생일 선물도 못 했는데 생일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한다. 아내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아내 돈인데…. 어쨌든 고마웠다.

안경 맞추는 일 말고 다른 볼 일까지 보고 났더니 낮 12시가 훨씬 지났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난다. 아내가 칼국수를 잘하는 집에 알아 두었다며 안내를 한다. 오래간만에 뜨끈한 칼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지금 나는 아내가 맞춰준 안경을 쓰고 있다. 새 것이니 모든 사물이 맑고 깨끗하게 보인다. 아내한테 화를 낸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선 관대한 편인데, 아내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선 너그럽지 못하다.

내가 달리기를 하면서 안경을 운동복 주머니에 넣었으면 집에 와서 얼른 꺼내놓았으면 아내가 세탁기에 넣고 돌리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내가 잠을 잘 때 안경을 책상 위나 사람이 밟을 수 없는 곳에 놔두었으면 아내가 발로 밟는 일이 없었을 텐데…. 원인 제공은 내가 하고 아내만 나무랐던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데, 우리는 먼저 남을 탓할 때가 많다. 잘못은 내게 있는데, 내가 오해받을 일을 했는데도, 남의 탓으로 돌리고 화를 낼 때가 많다. 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내 실수인 줄 알면서도, 알량한 자존심과 유치한 자기체면 때문에 먼저 다가가 서 사과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고개 한 번 숙인다고 해서 손상당할 명예도 없는데 말이다. 먼저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미안해" 그 한 마디면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다정한 이웃이,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왜 먼저 다가가 손 내밀어 화해를 청하는 큰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먼저 숙이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인사하면, 내가 먼저 사과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따뜻한 마음을 만날 수 있는데 왜 나는 그리 못하는 것일까? 지금은 그의 잘못이 크다 해도, 내가 먼저 큰 사람이 되어 마음을 먼저 열기만 하면 그 사람은 오히려 낯이 붉어지며 미안해 할 텐데…. 그 멋지고 아름다운 일을 왜 내가 먼저 못하는 것일까?

로마 콜로세움에서
로마 콜로세움에서박철
아내가 생일선물로 사준 새 안경을 쓰고 세상을 다시 보아야 하겠다.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 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 (누가 6,42)


내 눈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야 하겠다. 밝고 넓은 마음으로 잘한 것은 네 탓이고, 잘못한 것은 내 탓으로 돌리는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하겠다. 아직 해야 할 공부가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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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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