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력화시킨 건 자본가도 공권력도 아닌 여론이었다. 파업이 있자 인터넷 게시판엔 '귀족노동자들'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했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고, 파리 시민들의 성숙한 태도를 예로 들곤 하지만, 배부른 노동자들의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비난은 오히려 거세지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보수언론의 왜곡과 노동교육에 대한 부재 탓으로 치부하지만 최근엔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프레시안> 관련기사 바로 가기)라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면 노동운동은 정말 귀족적이고 왕자병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보수언론의 왜곡이 보다 큰 문제일까?
이런 혼란스런 의문에 조금이나마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책이 있다. 구해근의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사 펴냄)이다. 매우 탁월하고 또 그만큼 흥미로운 이 책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노동계급의 형성에 극히 불리했던 사회문화적 환경
먼저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제목에 주목해보자.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E.P. 톰슨의 고전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영향이란 역사주의적 혹은 구성주의적 계급관점이다.
이는 계급의식을 분명히 지닌 실체로서 노동계급의 형성은 생산체제 내의 구조적 위치를 통해 결정된다는 구조적 혹은 결정론적 계급 개념과 대비되는 것이다. 계급이란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나 제도의 영향아래 행위자의 역할을 통해 구성이 촉진될 수도 저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노동계급 형성에 매우 불리했다고 한다. 서구사회의 경우 노동기술을 중시하는 장인문화의 전통, 프랑스 혁명을 통한 변혁적 정치담론의 영향, 정당의 노동계급 지원 등이 노동계급 형성에 도움을 주었는데,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전무했다.
노동을 천시하는 유교문화적 환경에, 냉전환경의 반공주의는 노동계급 형성에 매우 비우호적인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환경을 형성하였다. 또한 한국의 어느 정당도 용공의 낙인 때문에, 친노동적인 태도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쉬기 위해 싸웠던 노동운동
그러면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한국의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어떻게 형성해왔을까. 역설적으로 이러한 억압적 환경이 노동계급의 형성을 촉진하는 요소였다.
극도로 열악했던 작업 환경이 노동자들이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투쟁하게 만든 요소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를 통해 70년대 초반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알 수 있었다.
1976년에 해태제과 여공들이 정부에 제출한 탄원서는 이를 실제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들은 "하루 12시간만 일하도록 해 주십시오. 일주일에 하루씩만 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공돌이, 공순이'라는 사회적 멸시의 분위기 속에서 관리자들이 행하는 전제적이고 모욕적인 통제방식이었다. 70년대 한 봉제공장에서 관리자는 "편지는 내 앞에서 뜯어보고 내용을 읽은 다음 가지고 가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은 80년대에 들어서도 차이가 없었다. 현대그룹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 최우선 요구사항 가운데 하나가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회사의 머리길이 규제 철폐였다.
강제적인 아침집합체조로부터 시작하는 공장생활은 군대의 연장 그 자체였다. 따라서, 당시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는 말 그대로 인간답게 대접받고 싶다는 한 맺힌 표현이었지 상징적인 수사가 아니었다.
이렇게 극도로 착취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조건하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교회나 노학연대의 도움에 힘입어 정부의 가혹한 탄압에 목숨을 건 저항을 이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켜켜이 쌓인 분노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폭발하였다. 물질적 목표보다는 인간적 존엄을 목표로 한 폭발이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긍지와 인간적 존엄을 보장해줄 수 있다고 믿고 노조 건설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정서에 회사와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은 단체교섭을 자주 계급전쟁의 형태로 만들었고 어떠한 양보도 완전한 굴복으로 해석되는 격렬함을 보였다. 이는 분명히 극단적으로 억압적이고 배제적이었던 노동체제의 산물이었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90년대의 변화
한국의 노동계급이 하나의 진정한 계급으로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87년 대투쟁 이후부터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경공업 여성중심의 산발적인 모습에서 대공장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조직화된 형태로 전진을 해나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런 발전을 중단 혹은 후퇴시키려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현재의 노동운동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변화이다.
먼저 국가와 자본의 대응이 변했다. 노동운동의 전진에 놀란 자본은 강압적인 '전제적 공장체제'에서 동의를 중시하는 '헤게모니체제'로 정의되는 정교한 전략을 구사한다.
노조의 인정을 통한 길들이기, 노동 유연화를 포함한 신경영전략, 기업문화운동, 다물 민족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 캠페인, 보수언론을 통한 경제 악화의 '노동자 책임론' 여론 조성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한 노동간부는 "지난 10년 동안, 자본은 완벽하게 준비했고,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우리를 상대했지만, 활동가들이 한 것은 자본과 국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똑같이 단순한 논리를 가지고 조합원들에게 파고드는 것밖에 없다(298쪽)"고 말한다.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급의 분화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IMF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급의 분화라는 변화였다. 대기업, 중소기업, 정규직, 비정규직 등의 구조적 균열은 한국의 노동계급을 형성해온 기초적인 동력을 허무는 것이었다.
한국의 노동계급이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구조적 요소는 노동계급의 동질성이었다.(291쪽) 똑같이 시골에서 올라와 기숙사에서 한솥밥을 먹던 여공들에서부터 지리적으로 집중된 공단지역에서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은 모진 탄압에도 똘똘 뭉쳐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급은 구조적으로 분화되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파고 속에서 소규모 사업장의 힘없는 노조들은 해체되었고, 힘있는 노조들은 소속 조합원들의 문제에만 매달려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노동쟁의는 대체로 강력한 노조가 있는 대규모 사업장에서만 발생했다. 다르게 말하면 연봉 몇 천 이상의 노동자들만이 파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로에 선 노동운동
여기서 저자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비슷한 상황의 브라질이나 남아공과 달리 '사회운동노조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1987년 전후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노동계급 일반의 광범위한 이해를 드러내고 대변하고자 하지 않았고 도시의 빈민지역운동을 지원하려 하지도 않았다."(287쪽) 즉, 한국의 노동운동은 사회운동노조주의 대신에 사업장 내 문제에만 치중하는 경제노조주의로 국한되었다.
그 이유로 먼저 유신 이후 '제3자 개입 금지' 등 노동운동이 공장문 밖을 넘지 못하도록 강제된 기업별 노동체제가 꼽힌다. 다음으로 브라질과 남아공과 달리 실업률이 매우 낮았다는 점이다. 높은 실업률은 노동자와 비노동자의 경계선을 흐리고 작업장과 지역사회를 연계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비인간적 대우라는 작업장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지역의 문제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노동운동이 이처럼 지역사회문제를 다루지 못한 사실은 역으로 시민운동이 번창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이는 노동계급운동과 중간계급 주도의 사회운동간의 분리를 낳았고 노동운동의 범위를 더 좁게 만들었다.(288쪽)
9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의 변화를 다룬 이 책의 마지막장은 '기로에 선 노동운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성숙한 노동계급으로 성장할지,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 머물러 고립된 모습으로 남을지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든지 간에, 한국의 노동계급은 한국 사회를 민주적인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한 그들의 역할로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저자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수언론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동현실
사실 파업은 노동자들의 기본권이다. 그런데 노동조합 조직률이 12%대에 머물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서 파업은 힘센 노조의 특권이 되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파업이 모든 노동자의 기본권이 되지 못한 상황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특권을 행사하는 노조에 분노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를 단순히 보수 언론의 왜곡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천만 노동자'니 '하나되어 싸우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노동계급은 분화되어 있다.
파업에 성숙한 유럽 시민들의 예를 자주 들지만 유럽국가들의 경우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다고 하더라도 단체 협약 적용률이 80~90%가 되는 경우가 많다. 즉, 내가 조합원이 아니어도 노동조합이 싸워 따낸 단체협약의 적용을, 다시 말하면 파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교해서 그동안 한국 사회의 파업은 시민들이 불편하면 할수록 위력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 혜택은 파업 노동자들만의 것이었다. 보수언론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입맛에 맞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언론의 공세가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이러한 현실이 바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의 여론을 전부 보수언론의 영향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노동운동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다. 그래서 지하철노조는 시민들을 위한 안전운행을 위해 인력 충원을 주된 요구사항으로 제시했고, 다른 노조들도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과 사회공헌기금을 주된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아직 여론에 영향을 줄 만큼의 성과는 없는 형편이다.
'뒤늦은 성장에 때 이른 침체'를 겪고 있다는 한국의 노동계급 앞에는 두 겹의 장애물이 놓여 있는 셈이다. 보다 보편적인 노동자의 이해에 중심을 둔 과제의 설정과 노동운동에 적대적인 보수언론에 대항한 싸움.
그리고 이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한국 사회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의 말처럼 노동운동은 한 사회가 인간다운 모습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구해근 지음, 신광영 옮김,
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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