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책을 한 권 읽겠다

[책읽기가 즐겁다 98] 가을은 책읽는 철? 출판사 문닫는 철?

등록 2004.09.10 13:55수정 2004.09.10 15:29
0
원고료로 응원
<1>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가을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옵니다. 제가 일하는 시골(충북 충주 신니)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퍽 쌀쌀합니다. 서울에선 아직 아침과 저녁에도 조금 더운 기운이 남아 있지만 산골에서는 어느덧 쌀쌀한 바람이 붑니다. 가을이라며 아침저녁으로 벌레 우는 소리로 온 산골이 가득한데, 이렇게 고운 벌레 소리를 즐길 수만은 없는 요즘이에요. 가을은 "책 읽는 철"이라고도 하지만, 요즘은 "가을은 출판사가 문 닫는 철"이 된 듯한 느낌이라 그렇습니다.


한편으로는 출판사들이 제 노릇을 못한 탓에 독자들이 등을 돌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 문화정책이 없는 터라, 도서관 시설이 제대로 없습니다. 도서관 시설이 있다고 해도, 출판사에서 오랜 세월 큰돈과 피땀 어린 정성으로 엮어낸 좋은 책을 사서 갖추지 않아요. 그러니 작으면서도 제 갈 길을 오롯이 가는 출판사마다 참 어려워하는 요즘입니다.

책살림을 퍽 알뜰살뜰 꾸려왔으나, 책이 참 안 팔린다며 끝내 문 닫고 마는 출판사 소식을 하나둘 들으면서 가슴이 저며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라크로 파병할 돈이 있다면 전국 곳곳에 조그맣더라도 알뜰한 도서관 좀 지어 주고, 도서관을 지었다면 그곳을 마을사람들이 즐겨 찾아갈 수 있도록 좋은 책을 꾸준하게 사서 볼 돈을 뒷배를 봐주라고요.

<아이들> 겉그림. 야누쉬 코르착이 지은 다른 좋은 책도 많습니다. 하나둘 즐겨서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이들> 겉그림. 야누쉬 코르착이 지은 다른 좋은 책도 많습니다. 하나둘 즐겨서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양철북
<2> 읽으려고 주문하고 산 책들

시골엔 책방이 없습니다. 새책방도 없지만 헌책방도 없습니다. 책 한 권 사자면 자동차를 얻어 타고 삼사십 분은 읍내로 나가야 조그마한 책방 하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읍내 책방에서 구경할 만한 책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책을 주문해서 받아 보아야 합니다. 요즘은 책방 구경을 잘 못해 본 터라 몇 권 주문해서 받아 보았습니다.

먼저 <야누쉬 코르착-아이들, 양철북(2002),8500원>을 주문합니다. 야누쉬 코르착은 폴란드 교육자이자 의사였던 사람입니다. 나치 독일이 유럽 여러 나라를 집어삼키고 피에 굶주린 학살을 했을 때, 자신이 꾸리던 고아원 어린이를 놓고 자기만 도망갈 수 없다며, 아이들 손을 잡고 당차게 가스실로 걸어 들어갔던 사람이에요.


시장에서는 덜 자란 것들은 값을 쳐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과꽃이나 사과도 똑같이 소중합니다.
새싹도 다 자란 옥수수 밭만큼 소중합니다.
<29쪽>

어린이도 어른도 똑같은 사람이며, 똑같이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사과와 사과꽃에 빗대어 말한 대목입니다. 그래요, 맞는 말이죠? 어린 새싹도 소중하고 다 자란 옥수수도 소중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들 마음은 어떻습니까?


다음으로 <이명원-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새움(2004), 10000원>라는 책을 주문해서 받아 봅니다. 평론가 이명원씨가 쓴 글은 거침없고 날카롭습니다. 번뜩인다기보다는 할 말을 차분하게 펼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다만 한 가지 아쉽다면 말을 너무 어렵게 한다는 것. 그래도 줄거리가 좋기 때문에 펼쳐서 차근차근 읽습니다.

…'사회지도층'이라니? 나는 이런 표현을 언론에서 접할 때마다 한국사회가 언어생활의 측면에서 보자면 중세적 신분사회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공인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래도 최소한의 사회에 대한 봉사나 의무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 단어 속에는 지배와 복종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계급의식만 녹아 있을 뿐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없다.<178쪽>

<맬서스를 넘어서> 겉그림입니다. '따님' 출판사는 환경 책을 전문으로 내는 드물며 소중한 출판사입니다.
<맬서스를 넘어서> 겉그림입니다. '따님' 출판사는 환경 책을 전문으로 내는 드물며 소중한 출판사입니다.따님
서울에 있는 책방에서도 몇 권 삽니다. <현진오,김사홍-설악산 생태여행, 따님(1999), 5600원>이란 책을 하나 고르고 <제인 빌링허스트/이순영 옮김-숲에서 생을 마치다, 꿈꾸는 돌(2004), 9500원>라는 책을 고릅니다.

다른 좋은 책도 많은데 저는 요새 일부러 환경 책을 즐겨 찾아서 읽습니다. 나날이 더러워지고 무너져 가는 환경이잖아요?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환경 문제를 좀 더 깊숙하게, 제대로 알아야겠다 싶어서 부지런히 보고 있어요. <레스터 브라운 외/이상훈 옮김-맬서스를 넘어서, 따님(2000), 6800원>와 <레스터 브라운/지기환 외 옮김-중국을 누가 먹여 살릴 것인가, 따님(1998), 6000원> 같은 책은 끝없이 늘어나는 인구 문제와 식량 문제를 아주 날카롭게 파헤친 살뜰한 책입니다.

자원소비의 증가는 부유한 나라에서나 가난한 나라에서나 환경에 나쁜 영향을 준다. 목재와 종이를 얻기 위한 벌채는 삼림파괴를 가져온다. 금속의 채굴은 하천을 오염시킨다. 또한 화학물질은 사람과 동물에게 해독을 끼치거나 암의 발병위험성을 높이고 또는 생식기능의 이상을 일으킬 수 있다. …자원의 소비가 산업국가에서 이루어지든 개도국에서 이루어지든 자원을 추출하고 사용하는 데 따르는 환경적 충격은 가난한 나라들에서 더욱 크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채광의 규제가 더욱 엄격해지자 회사들은 환경규제가 느슨한 라틴아메리카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마찬가지로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숲을 보호함에 따라 러시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중남미의 벌채가 증가하고 있다. <맬서스를 넘어서> 74쪽

환경은 우리나라에서만 잘 지킨다고 지킬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헤픈 씀씀이를 줄이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자연환경을 지키는 대신 '다른 가난한 나라' 자연환경을 무너뜨려야 해요.

퍽 두꺼워서 어느 세월에 다 읽을까 걱정이 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책 <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 씨앗을뿌리는사람(2004), 25000원>라는 책도 책방에서 골랐습니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에 들 만큼 대단한 출판사인 '랜덤하우스'라는 곳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책을 내는 사람들 마음결, 책 한 권 만드는 일이 어떠한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싶어서 골랐습니다. 책 줄거리도 괜찮게 읽을 만하지만, 뒤에 붙은 엮은이(이 책을 번역해서 내려고 마음먹은 출판사 편집자) 말도 참 재밌습니다.

<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 겉그림입니다.
<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 겉그림입니다.씨앗을뿌리는사람
…반대로,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서도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유진 오닐의 공개 금지 지시를 어기고 그의 미망인이 원고를 출간하라고 압력을 넣었을 때에도 고인의 뜻과 다르다는 이유로 유족과 맞서다가, 결국에는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출간을 포기하는 베네트 서프의 자세를 보라. 자기 출판사에서 책을 낸 저자가 사망하자마자 유족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미공개 원고를 얼씨구나 하고 책으로 펴내고, 차후에 그 사건이 문제가 되자 이런저런 변명을 해 가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급급했던 국내 어느 출판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출판인의 양심'이란 정말 이런 경우에나 쓰는 말이 아닐까? <535쪽>

유진 오닐은 '발표하지 않은 원고'를 자기가 죽은 뒤 몇 해 뒤에 내라고 마지막말을 남기고 그 원고를 랜덤하우스 사장에게 주었답니다. 랜덤하우스 사장은 그 마지막말을 지키고 그때까지 공개하면 안 된다고 했으나, 유족인 유진 오닐 아내가 법정 소송까지 해서 원고를 뺏어 와서 다른 출판사에서 펴냈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해 봐요. 이런 약속을 지킬 만한 출판사 사장이 우리나라에 몇 사람쯤 있을까요? 참 어려운 일일지 모르나, 약속을 하고 그때까지 지켜주고 간직하기로 했다면 손해를 보더라도 지킬 줄 아는 마음, 이런 '출판얼'이 있어야 우리나라 책 문화도 발돋움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형편을 보면 '눈앞에 보이는 돈'에 쫓겨 책 내기에 바쁘다 보니 오히려 독자들이 책에게는 등을 돌리지 싶습니다.

<3> 사고 싶은 책들과 다시 읽는 책들

새로 나온 소식을 들어서 동네책방에 주문은 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은 책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박도 엮음-지울 수 없는 이미지, 눈빛(2004), 35000원>입니다. 이 책은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죽 보여주던 '8·15 해방부터 한국 전쟁 종전 때까지 모습을 담은 사진을 모아서 엮어낸 책'입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간직하는 사진 가운데 480장을 추려서 엮었답니다. 우리들 지난날 모습과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살가운 책이라 생각해서 주문했는데 웬일인지 아직까지 책이 안 들어왔다고 하는군요.

오늘 전화를 걸어 주문하려는 책으로, <캐테 콜비츠, 운디네(2004), 38000원>라는 책이 있습니다. 콜비츠가 쓴 일기와 그린 작품을 함께 실은 책이랍니다. 콜비츠는 '무료로 가난한 노동자들을 진료하는 남편을 도우면서 판화작업에 몰두한' 사람으로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모든 창작 길이 막힌 사람으로, 가난하고 아프고 힘들고 굶주리는 모든 사람들, 그 가운데 어린이와 여성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판화로 담아낸 훌륭한 예술가입니다. 캐테 콜비츠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는, <정하은-캐테 콜비츠와 노신, 열화당(1986), 4000원>, <카테리네 크라머/이순례 외 옮김-캐테 콜비츠, 실천문학사(1991), 7500원>, <민혜숙-케테 콜비츠 :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재원(1995), 8000원> 이렇게 세 권이 나와 있습니다.

안타깝게 품절이 되어서 헌책방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는 만화책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대원(2000), 한 권에 3500원(모두 7권)>가 있습니다. 만화영화로도 나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인데 만화책으로 보는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만화영화에서도 느끼는 산뜻함과 깊은 울림이 만화책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오무는 14개나 되는 이런 눈으로,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아마 이 검은 숲을 정겹고 따스한 세계라고 여기고 있겠지. 우리에겐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5분 만에 폐가 썩어 버리는 죽음의 숲인데…. <1권 13쪽>

"깨끗한 물과 공기 속에서는 '무시고 야자'도 이렇게 작고 귀여운 나무일뿐이죠. 독기도 뿜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1권 82쪽>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냥 만화가 아닙니다. 생명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눈물겨운 만화예요. 그림 하나마다, 대사 하나마다 가슴을 깊이 울립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벌레"를 죽여야만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 그 어른들은 자연 환경을 함부로 더럽히고 짓밟은 끝에 자연 환경에게 '역습'을 당합니다. 그 어떤 환경 책보다도, 환경운동보다도 훌륭한 만화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한 대목.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오무'란 벌레를 죽이지 말라는 '나우시카'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대목입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한 대목.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오무'란 벌레를 죽이지 말라는 '나우시카'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대목입니다.대원
<4> 책 한 권을 손에 드는 느긋함을

먹고살기 팍팍하고 주머니에 돈 몇 푼 없기 때문에 책을 못 읽는 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꼭 '돈' 때문에 책을 못 읽고 안 읽는 건 아닌 듯해요. 극장에는 엄청난 젊은 사람들이 넘쳐 있고, 서울 신촌과 강남과 혜화동과 종로 골목에는 술 한 잔을 걸치는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거든요. 괴로워서 소주 한 잔을 걸친다고 한다면, 그 괴로움을 풀고자 헌책방에서 책 한 권을 1000원이나 2000원에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책방에서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들고 가까운 공원이나 쉼터로 나가거나 강둑이나 바닷가나 산 속으로 들어가서 다 읽고 나올 수도 있을 테고요. 집에서 차분한 노래를 들으면서 책을 읽고 마음을 비울 수도 있습니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없다면 가까운 도서관으로 찾아갈 수도 있어요.

아무래도 책 한 권을 읽으려는 느긋함을 잃어버리기에, 놓치기에 책을 못 읽지 싶습니다. 한 주에 하루쯤은 텔레비전을 끕시다. 자동차도 집에 둡시다(자동차가 없으면 더 좋고요). 그리고 우리 가슴을 돌돌돌 울리고 움직일 수 있는 살가운 책 하나를 찾으러 책방으로 나들이를 떠나 봐요. 책 한 권을 골랐다면 그 책을 가슴에 품으며 책냄새와 책느낌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봐요. 그리고 싱긋 웃으며 느긋하게 책 한 권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느긋한 우리 마음을 되찾아야 하는 일도 잘 되고, 우리 사회도 좀더 아름다운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

야누슈 코르착 지음, 노영희 옮김,
양철북, 200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작은책집으로 걸어간 서른해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4. 4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5. 5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