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 겉그림입니다.씨앗을뿌리는사람
…반대로,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서도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유진 오닐의 공개 금지 지시를 어기고 그의 미망인이 원고를 출간하라고 압력을 넣었을 때에도 고인의 뜻과 다르다는 이유로 유족과 맞서다가, 결국에는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출간을 포기하는 베네트 서프의 자세를 보라. 자기 출판사에서 책을 낸 저자가 사망하자마자 유족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미공개 원고를 얼씨구나 하고 책으로 펴내고, 차후에 그 사건이 문제가 되자 이런저런 변명을 해 가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급급했던 국내 어느 출판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출판인의 양심'이란 정말 이런 경우에나 쓰는 말이 아닐까? <535쪽>
유진 오닐은 '발표하지 않은 원고'를 자기가 죽은 뒤 몇 해 뒤에 내라고 마지막말을 남기고 그 원고를 랜덤하우스 사장에게 주었답니다. 랜덤하우스 사장은 그 마지막말을 지키고 그때까지 공개하면 안 된다고 했으나, 유족인 유진 오닐 아내가 법정 소송까지 해서 원고를 뺏어 와서 다른 출판사에서 펴냈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해 봐요. 이런 약속을 지킬 만한 출판사 사장이 우리나라에 몇 사람쯤 있을까요? 참 어려운 일일지 모르나, 약속을 하고 그때까지 지켜주고 간직하기로 했다면 손해를 보더라도 지킬 줄 아는 마음, 이런 '출판얼'이 있어야 우리나라 책 문화도 발돋움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형편을 보면 '눈앞에 보이는 돈'에 쫓겨 책 내기에 바쁘다 보니 오히려 독자들이 책에게는 등을 돌리지 싶습니다.
<3> 사고 싶은 책들과 다시 읽는 책들
새로 나온 소식을 들어서 동네책방에 주문은 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은 책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박도 엮음-지울 수 없는 이미지, 눈빛(2004), 35000원>입니다. 이 책은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죽 보여주던 '8·15 해방부터 한국 전쟁 종전 때까지 모습을 담은 사진을 모아서 엮어낸 책'입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서 간직하는 사진 가운데 480장을 추려서 엮었답니다. 우리들 지난날 모습과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살가운 책이라 생각해서 주문했는데 웬일인지 아직까지 책이 안 들어왔다고 하는군요.
오늘 전화를 걸어 주문하려는 책으로, <캐테 콜비츠, 운디네(2004), 38000원>라는 책이 있습니다. 콜비츠가 쓴 일기와 그린 작품을 함께 실은 책이랍니다. 콜비츠는 '무료로 가난한 노동자들을 진료하는 남편을 도우면서 판화작업에 몰두한' 사람으로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모든 창작 길이 막힌 사람으로, 가난하고 아프고 힘들고 굶주리는 모든 사람들, 그 가운데 어린이와 여성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판화로 담아낸 훌륭한 예술가입니다. 캐테 콜비츠 이야기를 다룬 책으로는, <정하은-캐테 콜비츠와 노신, 열화당(1986), 4000원>, <카테리네 크라머/이순례 외 옮김-캐테 콜비츠, 실천문학사(1991), 7500원>, <민혜숙-케테 콜비츠 :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재원(1995), 8000원> 이렇게 세 권이 나와 있습니다.
안타깝게 품절이 되어서 헌책방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는 만화책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대원(2000), 한 권에 3500원(모두 7권)>가 있습니다. 만화영화로도 나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인데 만화책으로 보는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만화영화에서도 느끼는 산뜻함과 깊은 울림이 만화책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오무는 14개나 되는 이런 눈으로,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아마 이 검은 숲을 정겹고 따스한 세계라고 여기고 있겠지. 우리에겐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5분 만에 폐가 썩어 버리는 죽음의 숲인데…. <1권 13쪽>
"깨끗한 물과 공기 속에서는 '무시고 야자'도 이렇게 작고 귀여운 나무일뿐이죠. 독기도 뿜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1권 82쪽>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그냥 만화가 아닙니다. 생명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눈물겨운 만화예요. 그림 하나마다, 대사 하나마다 가슴을 깊이 울립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벌레"를 죽여야만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 그 어른들은 자연 환경을 함부로 더럽히고 짓밟은 끝에 자연 환경에게 '역습'을 당합니다. 그 어떤 환경 책보다도, 환경운동보다도 훌륭한 만화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