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상인 출입금지' 건물 잠입에 성공하다?

<배달이야기 14>저녁 장사를 준비하면서 생긴 일

등록 2004.09.12 21:21수정 2004.09.1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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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식당도 내일부터 저녁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3월 개업하고나서 계속 점심 때만 장사를 했었는데, 요즘은 도저히 수지를 맞추기가 참 힘들어졌습니다. 여름에는 여름이니까 하면서 견뎠는데, 꽤 바람이 선선해진 요즘에도 원래처럼 회복되지 않은 것을 보니 정말 불황은 불황인가 봅니다.


장사를 처음 계획할 때 사무실이 많은 곳이라 저녁 식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고, 인건비를 비롯한 기타 부대비용이 매출보다 더 많을 것 같다는 계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저녁 장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일하는 사람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점심 때 배달하는 이모가 저녁까지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하기에 별다른 수고없이 사람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이제 "점심 때만 하고 가는 집"으로 각인된 사람들에게 저녁 장사 개시를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잘하지 못하는 편집이지만 직접 편집도 하고, '정식당, 이제 저녁 시간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라는 메인 카피 밑에 여러가지 설명을 넣었습니다.

저녁 식사는 오늘의 식사와 된장찌개 중에 선택을 할 수 있고, 점심과 저녁을 함께 주문할 시에는 할인 혜택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적힌 전단을 출력해서 가게앞 인쇄소로 향했습니다.

다음주 식단과 함께 마스터 인쇄를 돌리는 동안 배달 이모와 저는 유인물을 배포할 동선을 짰습니다. 주로 점심때는 구내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에 배달을 시켜먹을 일이 없는 곳부터 가기로 했습니다. 점심 배달은 할 수 없지만, 오후 3시가 넘으면 허용이 되는 건물입니다.


시간은 대략 5시 30분부터 시작해 저녁 시간이 다가올 때로 잡았습니다. 인쇄된 홍보전단에 다음주 식단과 개업 때 만들었던 사은품과 스티커를 함께 붙이는 작업을 하고 드디어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저는 사은품이 있는 것을 가지고 가서 그런지 상당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것 저것 물어도 보고 주문 약속까지 받았으니 꽤 기분 좋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배달 하는 이모는 조금 낯설었는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저녁을 맛있게 먹고자 하는 분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생각으로 돌리면 된다는 말과 함께 몇가지 요령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전단은 사람에게 직접, 그리고 가능하면 얼굴을 마주치며 뿌리면 효과가 크다는 등의 요령 말입니다.

그렇게 몇 군데를 가고 다음날 저녁 장사의 타깃으로 정한 건물로 향했습니다. 이 주변에서 가장 큰 건물이고 근무자의 숫자도 어마어마합니다. 그 규모에 걸맞게 후문에만 경비아저씨들이 4명이나 있습니다. 중앙 로비에도 한 명이 계시구요. 그곳은 배달이 금지되어 있는 곳입니다. 오후 3시가 지나야 배달을 허용하고, 일반인의 차량 통제도 엄격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전단을 박스에 넣고 경비아저씨들을 지나 문을 열려고 하니 떡하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잡상인 출입금지'. 순간 묘한 표정이 감돕니다. 잡상인. 그렇게 좋은 느낌으로 와닿지 않지만, 제가 이 건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잡상인인 걸 어쩌겠습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내려서 양쪽으로 나눠 이모와 함께 전단을 뿌렸습니다. "한 장만 두고 가세요"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꼼꼼이 읽어 보고 묻기도 하는 분들이 더 많아 기운이 났습니다.

그렇게 한층 한층 아래로 내려오다보면 전단의 양은 줄어들고 이모와 제 이마에는 약간씩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3층까지 내려오니 계단에 '직원 전용, 일반인 출입금지. 출구없음'이라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일단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직원 휴게실과 우편물 분류 창고였습니다. 역시나 2층까지 뿌리고 마지막 1층으로 내려와서 문을 여니, 바로 앞에 경비아저씨가 앉아있었습니다.

저희가 나온 곳이 바로 1층 중앙로비에 있는 경비아저씨의 안내데스크였고, 그 문은 경비아저씨 뒤쪽에 있는 문이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은 직원 전용 계단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하필 우리가 나온 곳이 경비아저씨와 청소아주머니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던 겁니다. 정말 시트콤에서나 나오는 장면 같았습니다.

순간 '잡상인'은 조금 긴장했지만, 재빨리 "수고하십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실 어딜 가나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경비아저씨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오고 나니 그 상황이 웃겨 웃음이 났습니다. 사실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도망자처럼 나와야 하는지 하는 생각에 약간의 쓴 웃음도 나올 수밖에요. 그래도 이 정도의 고생 안 하고 무슨 대가를 바라겠느냐는 마음으로 그냥 하늘 한 번 보고 웃어버립니다.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퇴근하고 있는데 전화가 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저는 이미 퇴근을 하였고, 저녁 배달은 내일부터인데…. 다시 설명을 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아쉬움 반 그리고 뿌뜻함 반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개업할 때처럼 설레입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설레고, 다시 도약을 하는 것 같아 힘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피곤함은 더해지겠지만, 더 많은 세상을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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