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는 아무나 먹나?

소풍가서 생긴 일

등록 2004.09.13 19:03수정 2004.09.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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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이 구석 저 구석을 천덕꾸러기처럼 돌아다니는 바나나를 발견하지만 누구 하나 눈길 주는 이가 없다. 대형할인마트에서 커다란 바나나 한 다발이 휴지 한 묶음만큼이나 싸게 팔리는 걸 보기도 한다.


'언제부터 바나나가 이렇게 찬밥 신세가 되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시절만 해도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은 나의 일년 행사 중 손꼽히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날 하루 수업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나는 이유이지만 요즘처럼 외출하기 쉽지 않은 때 멀리까지 나가보는 것도 소풍이 주는 기쁨이었다.

하물며 평소에 맘 놓고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한 간식거리까지 싸고 갈 수 있으니 어찌 아니 즐거우랴? 소풍 날짜가 확정되는 순간부터 간식 목록을 작성하며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다.

'초코파이, 알사탕, 환타, 아니 오란씨로 할까?'

드디어 소풍가기 전 날 엄마의 시장 행에 당당히 동행한다. 오늘만큼은 나를 위한 장보기니 나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야 하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루인 까닭이다.


김밥재료를 먼저 사고, 슈퍼마켓에 들러 과자와 음료를 사야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작성해 둔 목록은 어느새 스르르 잊혀지고 다양한 먹을거리 앞에서 끝도 없는 방황을 하게 된다. 그 사이 엄마의 장바구니에는 가장 모범적인 과자와 음료가 담겨지고, 나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풍선껌 하나가 추가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 과일가게에서는 빨간 사과가 몇 개 담겨진다. 이때까지 잔뜩 골이 난 내 모습을 짐짓 못 본 척 하시던 엄마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과일가게 아저씨에게 무언가 가격을 여쭤보신다.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이게 웬걸, 진열대 중앙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노랗고 기다란 바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어 내 간식 목록에 올려놓지도 못한 바나나를 획득하다니! 비싼 가격 때문에 낱개로 2개밖에 사지 못한 엄마는 언니, 오빠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하신다. 코끝이 찡해질 만큼 감동적인 순간이다.

그날 밤 소풍 가방을 챙기며 누런 봉투에 담은 바나나를 맨 밑에 놓고 그 위로 차곡차곡 과자를 쌓아놓았다.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머리맡에 놓인 소풍가방과 그 안에 있는 바나나를 생각하면 괜히 웃음이 나와 키득거린다.

영문도 모르는 언니는 "소풍 처음 가니? 촌스럽게 왜 그래?"하며 면박을 준다. 그 모습에 더 웃음이 나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낄낄거릴 뿐이다.

다음 날 소풍가방을 메고 출발하여 1시간여 걸어가는 동안 마음은 내내 들떠있게 된다. 벌써 음료수며 사탕을 꺼내 먹는 친구를 보지만 별로 부럽지 않다. 내 가방 밑에 든든하게 놓인 바나나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어느 시점에 꺼내 먹어야 가장 많은 급우들이 나를 바라보며 부러워할까 하고 고민이 될 뿐이다.

도착해서 약간의 놀이가 끝난 후 점심시간이 되었다. 이때까지 바나나를 꺼낼 기회를 잡지 못했다. '우선, 김밥을 먹고 좀 있다가 꺼내야지'하고는 밥을 먼저 먹는다. 짐을 좀 줄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물과 음료수까지 먹고 나니 배가 부르다. 더구나 친구들도 그새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조금 더 있다가 기회를 잡아야지'하고는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보물찾기와 장기자랑을 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어, 더 늦으면 안 되는데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잖아!'

바나나를 꺼내보지도 못한 나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각 반별로 인원 점검에 들어갈 즈음 주섬주섬 가방을 열어 바나나를 찾는다. 입도 대지 않은 과자며 빈 도시락 등을 뚫고 맨 밑바닥까지 손이 닿는 순간! 종이봉투의 축축함이 느껴졌다.

얼른 잡아 당겨내는 순간 봉투가 찢어지며 가방 위로 툭 떨어지는 것은… 짓이겨져 황갈색으로 변한 형체 없는 덩어리일 뿐이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뽀얀 속살에 병아리처럼 노란 외투를 당당히 걸치고 있어야할 바나나가 이렇게 망가져 있다니!

쿵! 하고 마음 한 편이 무너진다. 고이고이 모셔놓는다고 맨 밑바닥에 놓인 바나나는 온종일 가방 안에서 도시락과 음료수에 눌려 변색해 버린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소풍갈 때마다 바나나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워낙 비싸서 쉬이 살 수도 없었지만 어쩌다 산 것조차 미숙한 손동작으로 껍질을 훌렁 벗기는 바람에 홀라당 땅에 떨어뜨리는 황당한 경험만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바나나를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특히 누군가가 맛없다고 바나나를 버릴 때면 가슴이 아려오기도 한다. 너무 흔해진 먹을거리 앞에서 이젠 더는 가슴 뛰는 경험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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