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부쟁이> 그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며

젠더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 공연작, 19일까지 대학로에서 공연

등록 2004.09.16 02:42수정 2004.09.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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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의 '녹색배꼽' <쑥부쟁이>(작가·연출 추민주)는 명랑하고 씩씩한 쑥부쟁이의 삶을 유쾌하게 그린 뮤지컬이다. 보는 내내 흥미로웠으며 어느 장면에서는 눈물이 났고 어떤 부분에서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흘러나오는 춤과 음악은 흥겹고 아름답고 진솔했다. 특히 다양한 장르를 활용한 음악은 극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면 어깨가 들썩거리고, '얼씨구'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만큼 배우들은 진지하고 경쾌했으며 발랄했다.

a 동생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쑥부쟁이를 놀리거나 걸핏하면 장가보내달라고 떼를 쓴다.

동생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쑥부쟁이를 놀리거나 걸핏하면 장가보내달라고 떼를 쓴다. ⓒ 명랑씨어터 수박

그러나 막이 내렸을 때 필자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하나의 작품으로만 보자면 단순한 줄거리 외에 딱히 흠잡을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젠더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의 공연작으로서 본다면 뭔가가 아쉬웠다. 딱 2% 부족한 그런 느낌이었다.

우선 주인공 쑥부쟁이는 지나치게 착하다. 철없는 동생들과 병을 앓는 홀어머니를 먹여 살려야 하는(그것도 쑥을 캐서 말이다!) 고된 현실에도 불평 한 점 없다. 거기다 명랑하기까지 하다. 시종일관 생글생글, 얼굴에 '명랑'이라는 두 글자를 써붙인 듯하다.

남동생이 여럿 있지만, 죄다 어린애들마냥 철이 없어 일을 돕거나 배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허리가 아파 일을 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집안 일을 모두 쑥부쟁이에게 떠넘기고는 쑥부쟁이가 조금이라도 지체할라치면 불호령을 내린다.

이같은 캐릭터들은 전래동화의 전형성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쑥부쟁이는 "사내로 태어났으믄 이 산 저 산 뛰어다니고 싶다"고 노래하지만 그는 어디론가 떠나지도 않고 동생들을 야단치지도 않는다. 그저 부지런히 쑥을 캘 뿐이다.

a 쑥부쟁이는 단호히 사냥꾼을 떠나보낸다. 그는 '순정' 혹은 '순결'에 기대려 하지 않는 '씩씩한' 여자다.

쑥부쟁이는 단호히 사냥꾼을 떠나보낸다. 그는 '순정' 혹은 '순결'에 기대려 하지 않는 '씩씩한' 여자다. ⓒ 명랑씨어터 수박

쑥부쟁이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도 그렇다. 사냥꾼은 "호랑이를 잡아와 정식으로 청혼하겠다"며 호탕한(실은 느끼한) 웃음을 날리지만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 순 거짓말이다. 그는 아내에 자식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사냥꾼을 떠나보낸 쑥부쟁이는 아이를 낳다 죽는데 이는 불륜에 대한 대가를 여성이 일방적으로 치르게끔 하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을 연상시키는 결말이었다. 제 손으로 먹여 살린 식구들 대신 흰 풀꽃들만이 그의 죽음을 슬퍼할 뿐이다. 슬프고도 지루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태어난 딸은 제 어미와 똑같이 명랑하게 웃으며 "철없는 삼촌들과 병든 할머니를 보살피겠다"고 노래한다.

사실 이러한 요소들은 보기에 따라서 긍정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 쑥부쟁이의 명랑함은 '못생기면 착하기라도 해야한다'는 사회의 폭력적 관념에 순응한 것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난에 낙관적으로 대처하는 현명함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쑥부쟁이의 명랑함은 그를 존재케 하는 원동력이다.


또한 쑥부쟁이의 죽음은 착하기만 한 구세대, 그래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던 과거 여성들의 삶을 종식하는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딸은 어미의 가르침대로 노루도, 사냥꾼도 믿지 않는다.

a 딸 쑥부쟁이는 제 어미의 명랑함을 쏙 빼닮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착하지 않다'.

딸 쑥부쟁이는 제 어미의 명랑함을 쏙 빼닮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착하지 않다'. ⓒ 명랑씨어터 수박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반드시 쑥부쟁이로 대변되는, 지난 세대의 죽음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려져야 하는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물음이다. 쑥부쟁이의 딸은 그 어미와 함께 이 산 저 산 뛰다니며 자유롭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어미 쑥부쟁이는 딸에게 자신의 지혜를 물려주면 좋지 않았을까?

물론 망설임없이 칭찬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사냥꾼을 보낼 때 쑥부쟁이의 단호한 외침-"사랑은 그런 게 아녀, 사는 것은 그런 게 아녀"-은 분명히 지난 세대 여성들을 옥죄어왔던 어떤 관념을 스스로 풀어버리는 행위였다.

그리고 뱃 속의 딸에게 불러주는 노래-"노루도 믿지말고 사냥꾼도 믿지말라"는 내용의-는 주체적이도 당돌한 삶을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강력한 메시지였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 어미 쑥부쟁이의 지혜를 익힌 딸의 삶에서 다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쑥부쟁이 딸의 삶이 어떠할 지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이 영악하고 똑똑한 아이가 쑥 바구니를 집어던진다면 어디로 튈지, 무슨 행동을 할지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진짜 극의 재미는 거기에서 나오지 않을까?

남몰래 <쑥부쟁이>의 다음 편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은 이러한 기대 탓이다. 그 전까지는 딸 쑥부쟁이의 예측할 수 없는 삶이 줄 희망과 재미의 색깔을 머릿속으로만 그려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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