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싸운 얘기까지 올릴 거 아니지?

등록 2004.09.17 16:37수정 2004.09.1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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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선 엄마, 백중재 아래께로 사진기 들고 빨리 와 봐. 여기 좋은 거 있당께. 얼른 와. 알았지?"


전화벨이 울리더니 우리 동네 한영자 여사가 숨 넘어가는 소리로 저를 찾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왜요?"

지난 번 <오마이뉴스>에 옆집 할머니와 텃밭 농사를 짓게 된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올린 것을 옆집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보여드렸습니다. 그동안 제 사는 이야기 소재로 옆집 할머니를 많이 등장시켜 놓고도 정작 당사자에게는 한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인터넷과 <오마이뉴스>라는 매체를 설명하기가 복잡해서 그랬는데 요즘엔 내가 무슨 일이든 카메라를 들이밀며 포즈까지 요구하는 일이 많아지니까 도대체 내가 뭔 일을 꾸미는지 강한 호기심을 품더군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옆집 할머니를 모셔다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에 실린 사진부터 보여드리고 그동안 몰래 당신을 우려먹던 이야기들까지 천천히 읽어드렸더니 마치 TV에라도 나온 것처럼 좋아하십니다.


할머니는 당장 갖고 다니는 휴대전화로 아들, 딸, 손자들에게 전화를 걸더니 "엄마(할머니) 인터넷에 나왔다" 그러시는 겁니다. 덕분에 댓글이 많이 달렸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할머니 집에 놀러오는 동네 사람들마다 붙잡고 자랑을 해서 그 기사를 보겠다고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생겼습니다.

한영자 여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인터넷에 올릴 만한 것이 있다고 저한테 기사거리를 그렇게 제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한영자 여사의 바깥 양반인 이창원씨에게도 빨리 와 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두 분이 따로 전화하시는 것이 이상했지만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이창원씨 내외가 저한테 제보한 주인공은 '으름'이라는 열매였습니다. 겉 모양은 키위 비슷하게 생겼는데 속은 플레인 요구르트 같은 달콤한 액체가 씨와 함께 있는 야생 열매입니다.

나무에 달린 으름들
나무에 달린 으름들오창경
달콤하게 쫙 벌어진 으름 열매
달콤하게 쫙 벌어진 으름 열매오창경
"제선 엄마는 이런 거 첨 봤지? 빨리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라고 불렀당께."
"우리 어렸을 적에는 이런 게 주전부리거리였지 딴 게 있었나. 그래도 제선 엄마 오면 사진 찍으라고 한 개도 안 따먹고 기다렸수. 싸게 몇 방 찍고 먹어보랑게."

시골에 살다보니 실제로 으름을 보기도 했지만 선뜻 손이 안 가게 투박하게 생겨서 먹어볼 마음이 내키지 않던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여기에서 으름이 있는 줄 아셨어요?"

으름 덩굴이 있는 곳은 우리 동네와는 많이 떨어진, 항상 차를 타고 지나다니는 길 옆 숲 속이라서 눈에 띄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걸어가면서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서 물어보았습니다.

"응, 우리 아저씨한테 운전 연습시켜주다가 싸웠거든. 아저씨가 삐져서 그냥 운전 안 하고 만다고 차 놓고 걸어가다가 으름 달린 것을 봤다쟎여."

예순 네살 이창원씨는 얼마 전에 스무 번도 넘는 도전 끝에 겨우 운전 면허증을 손에 쥐었지요. 그동안 벌써 면허를 딴 마나님, 한영자 여사가 운전하는 차만 타고 다니다가 드디어 도로 연수를 시작한 모양입니다.

"부부 간에 운전 연습 시켜주다가 이혼하는 집들도 많다는데 곧 두 분 이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띠 동갑인 두 분은 평소에도 티격태격 잘 다투는 편이라 내가 좀 과장을 했습니다.

"이 으름 좀 얼른 먹어 봐. 원판('매우, 꽤'에 해당하는 충청도식 부사) 달다니께."

정말 익을 대로 익어서 쩍 벌어져 하얀 속을 보이고 있는 으름의 맛은 무척 달았습니다. 저한테는 으름 열매의 단 맛이 너무 느끼할 정도로 달아서 입맛이 당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 먹어 본 기억이 있어서인지 이창원씨 부부는 손이 안 닿는 곳까지 안간힘을 쓰며 으름 열매를 따서 맛있게 먹습니다.

"내 손 좀 잡고 있어 봐. 저기 위에 두 개 달린 거 저것 좀 따게."

'삐쳤다'던 이창원씨가 어느 새 한영자 여사에게 손을 내밀며 한껏 까치발을 세웠습니다.

"그냥 냅둬유. 괜히 그러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어쩔라고 그런대유. 아서유. 아서."

운전 좀 먼저 배웠다고 한바탕 위세를 떨었을 한영자 여사는 어느새 얌전한 '조강지처'로 돌아와 있습니다.

"그럼 옆에 참나무에 올라가서 손닿나 보게 내 응뎅이 좀 받쳐줘 봐. 당신 거기 미끄러지지 않게 발밑을 잘 보고."
"쓰레빠(슬리퍼) 신은 발로 어딜 올라간대유. 가만 있어봐유. 내가 차에 가서 장대를 가져다 드릴텡게. 행여 나무에는 올라가지 마유."

으름 열매만 단 줄 알았는데 황혼 커플의 닭살 모습도 단 맛의 진수였습니다.

"두 분 조금 아까 싸운 거 맞아요? 만날 서로 웬수 같다고 하더니 속으로는 엄청 위하시면서 그렇게 내숭 떤 거였어요? 쫙 벌어진 으름만 골라 드시더니 분위기가 갑자기 달콤해졌네. 이 으름이 사랑의 묘약인가?"

정말 오랜만에 두 사람의 다정한 대화를 들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어른들은 서로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항상 속마음은 따로 두고도 그걸 잘 표현하지 못해 감정의 골을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좀 하세요. 보는 눈들도 없고 두 분만 사시는데 지금처럼만 하시면 싸울 일도 없겠네."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한영자 여사는 저한테 찾아와 하소연을 하는 터라 제가 이렇게 해도 노여워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제선 엄마. 우리 싸운 얘기까지 오마이뉴슨가 뭔가에 올릴 거 아니지? 으름 딴 얘기만 써 알았지?"

한여자 여사가 머쓱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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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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