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희 할머니김진이
화려한 전원주택에 요사스런 카페, 식당들까지 곳곳에 늘어서 있는 강화에서 초가의 풍경은 오히려 너무 낯설다. 지은 지 50년이 되었다는 이 초가에는 황영희(75) 할머니가 30년째 살고 있었다.
"이 집은 50년 됐어. 그때 피난 나온 사람들이 이 일대에 다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 때 지은 거야. 나는 30년 살았지. 내 원 고향은 강화군 교동인데 남편이 죽고 살림이 다 박살이 났어. 여기 와서 포구에서 물건 받아다 팔면서 애들 키우고 했지. 30년 전 3만원을 주고 샀어. 건물 값만 주고 산 거지. 땅은 안 동네 김서방네 종중 땅이야."
포구에서 꽃게, 새우, 밴댕이 같은 걸 받아다 40리씩 걷는 곳까지 가서 팔아다 자식들을 가르쳤다. 자식 넷을 다 인천,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게 했으니 할머니의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식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아들 둘에 딸 둘, 4남매를 두었으나 다들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란다.
"작은 아들은 떠댕기면서 돈벌이 했는데 전과 13범이라는 깡패한테 칼에 찔려 일도 못하게 됐지. 지금은 연락도 끊어지고 어디에 사는지도 몰라요. 큰아들은 의정부에 사는데 사람 자체가 못된 것이 아닌데 돈을 못 벌어. 7년 전부터 웬일인지 정신이 오락가락 해서 의정부 정신병원에 넣었지. 나랑 지 처랑 돈을 댔는데 결국 병원비가 없어 도로 끄집어냈어. 며느리는 애들 데리고 친정 가고 큰아들은 자취를 감췄어.… 내가 눈물을 흘린 게 강을 이뤘을 것이여."
딸들도 시집가서 사는데 다들 자기 집도 없이 어렵게 산다고. 말문이 터진 할머니의 살아온 세월이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내가 강화 교동 황씨네 최고 종갓집에서 났어. 손이 모자라 친정아버님이 나를 아들 보듯이 했지. 우리 집이 얼마나 부잣집이었냐면 결혼식 때 일하는 사람인 '하님'이랑 소잡고 돼지 잡는 사람은 1년 내 항시 두었어요.
그런데 왜정 때 처녀 공출한다고 해서 잘못 시집을 보낸 거지. 사위를 3년을 데려다 가르치고 땅을 1만평을 해줬어요. 1만평 땅 해주면서 우리 아버지가 사위한테 당신 자식 고생시키지 말라고 당부를 했지. 우리 딸은 검부락지(검불) 하나 만지지 않은 애라고."
그렇게 많은 땅을 시동생이 다 날리고 남편은 울화병에 걸려 죽었다. 형이 죽자 시동생은 살고있던 집까지 내놓으라고 해서 할머니는 입던 옷 하나만 가지고 이곳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