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쭈쭈' 만지고 잠들다

등록 2004.09.22 00:34수정 2004.09.22 09:2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들 하나에 딸 다섯의 육남매를 키운 엄마의 젊은 시절을 내가 중년의 나이가 되어 그때를 돌이켜 보면 자신의 삶은 하나 없는 오직 자식들만을 위한 희생의 삶이었지 않나 싶다.


'꼼꼼한 목수'였던 남편은 '이억만리 전쟁터인 월남'으로 돈벌러 가고, 당시 사십도 안되었던 엄마가 그 많은 아이들을 혼자 키웠을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신기한 생각까지 든다. 이후 아버지는 월남에서 10년여만에 병든 몸으로 돌아왔고 엄마는 또 병수발로 수년을 고생하였다.

아버지가 월남에 가서 '돈을 많이 벌던 시절'은 내가 초등학생 때로 대학생이던 오빠, 고등학생인 큰언니와 작은언니, 나와 두살 터울의 세째언니 그리고 네살 아래 막내 여동생까지 엄마에겐 정말 올망졸망한 '자식 새끼들'이었다.

우린 동네에서 '딸부잣 집'으로 통했다. 대학생이던 오빠는 늘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통금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는 통에 집에는 엄마와 다섯 딸들만이 버글대는 '여인 천하'였던 것이다.

딸들이 유난히 많은 덕에 우리집은 늘 웃음이 넘쳤다. 큰언니는 작은 언니와 단짝이 되었고 나는 세째언니와 단짝이었다. 막내는 모두에게 귀염을 받았는데 특히 오빠 친구들에게는 장난감 같은 존재여서 친구들이 올 때마다 막내에게만 용돈을 주기도 했다. 난 그것을 몹시 시샘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 친구들이 막내에게 용돈을 주면 난 어떻게 해서라도 가게에 가서 아이스케키나 눈깔사탕 등 먹을 것을 사게 한 다음 그것을 뺏어먹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다.


동생은 언제나 언니의 질긴 요구에 굴복하여 돈을 써버렸고 언니의 협박에 못 이겨 아이스크림을 '몇 입씩' 뺏기고는 했다. 자꾸 속는 느낌이 들었던지 어떤 때 동생은 무엇인가를 사먹자고 꼬셔대는 나를 엄마에게 일러 야단을 맞게 하기도 했다.

세째딸은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듯 세째 언니는 얼굴이 예뻤다. 신설동에 살면서 학군이 좋다는 이유로 서대문의 한 초등학교를 세째 언니와 함께 다녔는데 사람들이 언니만 예쁘다고 칭찬하는 반면 내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집에 오는 내내 언니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이 퉁퉁 불어 온 적도 있었다.


세째 언니와는 노래를 함께 자주 불렀다. 나중에 교회 성가대에서 열심히 활동할 정도로 성악에 소질이 있었던 언니는 소프라노로, 나는 알토로 화음을 맞추며 유행가도 함께 부르고 동요도 함께 불렀던 예쁜 기억이 있다. 한 살 차이로 사춘기를 지나 성년의 문앞에 있던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둘만의 비밀스런 얘기도 많이 나누는 것 같았지만 나이어린 우리들은 끼워주지 않았다.

그렇게 웃음이 많은 딸부잣집의 말썽꾸러기는 나였다. 오빠는 외아들의 장남으로 아버지가 비운 자리를 대신해 가장 대우를 받았고 큰언니는 엄마 대신인 맏딸이라, 작은 언니는 몸이 약해서 세째언니는 야단맞을 짓을 하지 않아서, 막내는 아직 어리니까 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엄마는 물론이고 오빠나 큰언니에게 야단을 맞거나 매를 맞는 사람은 늘 나의 몫이었다.

매를 맞는 가장 큰 이유는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어도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아 "저놈의 기집애는 매를 들면 잘못했다고 빌든가 도망이라도 가야 하는데 날 잡아잡수 하고 그대로 있으니 매를 안때릴 수 가 없어"라는 것이 내가 매 맞는 이유였다.

식구들의 구박을 억울하게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언니와 엄마의 놀림에 더해 오빠까지 거들라치면 난 정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 혼자 고민에 빠지고는 했다. 누군가를 놀리는 장난까지 우리 가족은 똘똘 뭉치기도 했던 것이다.

엄마가 없는 집은 정말 적막했다. 그래서 나와 막내는 엄마가 어딘가를 가려고 한복이라도 곱게 차려입는 눈치가 있으면 좇아가겠다고 엄마 치마폭을 잡아 당기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냉정하게 나의 손을 뿌리치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와 막내는 몇 미터 간격으로 엄마의 뒷꽁무니를 멀찍이 뒤 따라가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나도 갈래"를 노래처럼 되풀이하여 떼를 쓰면 결국 버스 정거장 앞에서 때릴 듯 주먹쥔 손을 치켜들며 "빨리 집에 안 들어가?"라는 엄마의 협박성 면박을 듣고야 쭈뼛쭈볏 뒤로 물러서곤 하였다.

여인천하 왕국의 여인네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때는 단연 식사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만든 동그란 상에 오빠까지 7명이 앉아 식사를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금도 남아 있는 그 상은 아주 작았다.

여인들끼리만의 시간은 또 있었다. 추석이면 둘러앉아 어린 막내까지 송편을 빚으며 예쁘게 송편을 빚어야 예쁜 딸을 낫느니 하며 서로 빚은 송편이 예쁘다고 엄마에게 심사평을 좋게 받으려 애썼던 기억도 난다.

설날에는 엄마가 흰떡을 보기 좋게 썰고 엄마가 완벽하게 준비해 놓은 재료들로 만두를 빚고 모찌떡(찹쌀떡)을 만들었다. 엄마는 우리가 빚어 놓은 만두를 한소쿰 끓여 제사상에 올려놓을 것을 따로 덜어 놓은 나머지는 일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내 놓았다.

만두를 빚자 마자 끓여 먹기 바쁜 우리를 보며 엄마는 '사람 열 명이 소 열 마리 먹는다'는 옛말을 하며 일하기보다는 먹기 바쁜 자식들을 흐뭇한 듯 바라보기도 하였다. 우린 송편을 빚으며 만두를 빚으며 무에 그리 깔깔거리며 웃을 일이 많았던지 밤새 웃음이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여인천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잠 잘 때이다. 네 개의 방 중 두 개는 세를 주었고 방 하나는 당연히 오빠가 차지하고 나머지 안방에서 엄마와 딸 다섯이 한방에서 잠을 잤다.

침대의 퀸사이즈 정도의 이불이었을텐데 한 겨울엔 그 정도 크기의 이불로 엄마와 우리 딸 다섯 모두가 덮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작은 이불로 어떻게 여섯 명이 한 이불 속에 잘 수 있었을까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나름대로 비결은 있었다. 엄마 옆에 딸 둘이 꼭 붙어 자고 나머지 세병은 부채꼴로 퍼져 누우면 이불 속에서는 여섯명의 발이 모두 한 곳에 모이게 되는데 우린 서로의 발을 밀며 당기며 자신의 발이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 이불 속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르고는 하였다.

엄마 옆에 자기 위해 나와 막내 그리고 세째언니까지 매일 밤 쟁탈전을 하듯 엄마 옆을 파고 들었고 엄마 옆을 차지한 사람은 엄마 젖을 만지거나 손을 잡고 자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던 시절이었다.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이 가을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듯 내게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이제 모두 중년이 되어버린 언니들과 한 이불 속에 모두 모여 잘 수 있는 기회도 없지만 난 지금 엄마와 함께 잠을 잔다. 언니들과 아무런 쟁탈전 없이 내가 이젠 '아이'가 되어버린 엄마 옆을 독차지해 버린 것이다.

원래부터 요실금이 있던 엄마가 5년 전에 치매에 걸린 후엔 밤에까지 자꾸 오줌을 싸는 바람에 안방이며 거실, 화장실까지 하룻밤에 몇 번씩이나 이를 치워야 했다. 심지어 밤새 네 번씩이나 오줌을 싸서 걸레질에 엄마를 씻기기까지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적도 있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자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자주 일어나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부시럭거림 소리가 나면 엄마를 일으켜 화장실로 즉각 가야 방이나 거실에 오줌을 싸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엄마의 손을 잡고 잔다. 치매에 걸린 뒤부터 부엌일을 하지 않은 엄마의 손은 마치 아기손처럼 보드랍다. 가끔은 '엄마 쭈쭈 만지자' 엄마 젖을 만지려 들면 '니것도 만져보자'며 엄마는 역공격을 하여 엄마와 난 이불 속에서 격렬한(?) 저항과 공격으로 손싸움을 펼치며 깔깔댄다.

그렇게 한바탕의 장난으로 웃고 나면 엄마는 잠이 든다. 틀니를 빼고 잠든 엄마의 잠든 모습은 영낙없는 갓난아이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너무나 평온한 얼굴... 난 그 옛날 엄마가 내게 그랬듯 "엄마 이제 코- 자야지"라며 가슴을 토닥거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볼도 쓰다듬는다.

엄마 아버지의 고생 덕에 얻었던 어린시절의 평화는 다 어디 가고 현실의 고통과 갈등이 더 많은 지금의 삶은, 우리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날들이 있었는지 새삼스러울 정도로 기억이 희미할 뿐이다.

이번 추석엔 가족들과 함께 그 희미한 기억을 한번 들추어내 보면 어떨까?

어렸을 때처럼 엄마 손 잡고 잠자리에 함께 누워 말라붙은 '엄마의 쭈쭈'도 만져보고 엄마 젊은 시절의 얘기며 나 어릴적 얘기도 나누면서 어린 시절로의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엄마에겐 '가장 행복한 추석'을 선물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3. 3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4. 4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