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서점에서 만납시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32) 메마른 영혼을 위하여

등록 2004.09.21 07:51수정 2004.09.2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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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사람의 서울 나들이


산골에 내려온 뒤 가능한 나들이를 자제하건만 그래도 한 달이면 한두 번 서울행 버스에 오른다. 엊그제도 안흥 시외버스정류장에서 서울행 직행 버스에 올랐다. 늘 그랬지만 버스 안에는 승객이 미처 반도 안 찼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한다'고 하더니 나도 별 수 없이 이 낯선 산골마을에 그새 적응된 모양이다. 요즘은 서울에 가면 오히려 서먹서먹하고 거기도 내 집이 있건만 마치 남의 집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피치 못할 사정(주로 사람 만나는 일)으로 그동안 삶의 근거지였던 서울에 갈 때는 여러 볼 일들을 한데 묶어두었다가 하루나 이틀 동안 시차를 둬서 한꺼번에 만나고 돌아온다. 만나는 장소가 상대방 사무실이 아닌 경우로 내가 정할 때는 거의 대부분 서점에서 만나자고 한다.

한 10년 전부터 서점을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였더니 여러 가지로 좋았다. 우선 교통이 편리해서 상대가 찾아오기 쉬웠고, 교통사정으로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어도 서점에 잔뜩 진열된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면 금세 시간이 가기에 지루한 줄 몰랐다.

상대가 약속을 까먹어 좀 심할 경우 한두 시간 정도 늦어도 그리 짜증나지 않게 기다릴 수도 있다. 책을 뒤적이다가 마음에 들면 사기도 하고, 오는 친구에게 선물용으로 마련하기도 한다.


이렇게 좋은 약속장소를 이용하게 된 것은 한 출판인 때문이었다. 지금은 열매출판사를 꾸리고 있는 황인원씨와 약속하면 그는 꼭 서점으로 정했다. 두어 번 그곳에서 만나보니 시간 보내기도 좋았고, 또 비싼 찻값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그 참에 신간도 베스트셀러도 한 번 훑어볼 수 있어서 독서계의 경향도 살필 수 있는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일반 시민들이 부담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문화공간이 거의 없기도 하고, 그나마 있는 시설마저도 잘 이용치 않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된 이후 문화시설이 조금 늘어난 듯하지만, 아직도 일반 시민들의 활용이 생활화되지 않고 있다.


나의 빈 머리를 채웁시다

a 워싱턴의 한 마을 도서관

워싱턴의 한 마을 도서관 ⓒ 박도

필자가 지난 2월 28일 워싱턴에 머물고 있을 때,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환경정책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 권헌열씨가 굳이 자기 집으로 초대를 했다. 권씨는 부인이 저녁식사를 준비할 동안 자기가 사는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서울 촌사람에게 워싱턴 시민들이 사는 마을을 구경시켜 주었다.

권씨가 안내한 곳 중, 'Centreville Regional Library'라는 동네 도서관을 본 것이 가장 인상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라면 일개 동(洞)의 도서관인데도 시설이 좋았고, 많은 주민 특히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게 무척이나 부러웠다. 더욱이 그 도서관에는 한국 책도 꽤 많이 소장돼서 나그네를 놀라게 했다.

내가 학교를 그만 두면서 가장 아쉬워했던 점은 대학 도서관 이용을 원활히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대학부속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무시로 대학도서관 책을 빌려볼 수 있었는데 퇴직하니까 일체 대출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서울에 있을 때는 꼭 필요하면 대학도서관에 가서 열람할 수 있었지만 안흥에 내려오니 자연 도서관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동은커녕 면소재지에도 아직 도서관이 거의 없고, 군청 소재지도 도서관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좀 큰 지방 도시의 시립도서관을 찾아도 참고할 만한 책은 거의 없다.

도서관이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마련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민들은 읽을 만한 책이 없기에 도서관을 찾지 않는다고 하고, 도서관 측에서는 주민들이 도서관을 찾지 않기에 부실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아무튼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너무 멀리하고 있다. 현대는 버튼 하나로 모든 게 작동하는 '디지털 시대'다.

이런 때일수록 사람들이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텐데, 표피적인 영상 문화에만 젖어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점차 단세포적이요, 즉흥적인 경향으로 짙어가는 느낌이다. 그런 탓인지 우리 사회는 갈수록 기상천외의 끔직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를 위하여, 그나마 남아 있는 서점들을 그대로 남겨두기 위하여, 우리 모두 만남의 장소를 서점으로 정하면 어떨까? 두 사람 찻값이면 책도 한 권 살 수 있으리라.

깊어가는 가을 밤, 지난 여름 무더위로 비어 버린 나의 머리를 채우면서 그리운 이에게 '가을 편지'도 한 통 띄운다면, 내 영혼은 비단 위에 꽃수를 놓는 것처럼 아름다워질 것이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김현승 <가을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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