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만의 잔치를 벌이자구"

추석이 괴로운 '솔로'들의 저녁 식사

등록 2004.09.25 23:44수정 2004.09.2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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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도리탕. 닭도리탕을 할 때는 끓는 물에 닭을 살짝 데친 후 볶는 게 기름기 제거에 좋습니다.
닭도리탕. 닭도리탕을 할 때는 끓는 물에 닭을 살짝 데친 후 볶는 게 기름기 제거에 좋습니다.나영준
여자 넷에 남자 하나. 머릿수만 언뜻 생각하면 TV 오락 프로그램 <여걸 파이브>가 떠오를 법도 합니다. 평소 정기적으로 만나는 동창회 멤버(?)의 구성원입니다. 물론 남자 한 명은 저입니다.


남들은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워낙 여학생들이 많던 과를 다녔기에 정작 저 자신은 별다른 느낌이 없는 그저 '동창생'들 입니다.

보름 전쯤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부모님이 오랜만에 제주도 여행을 가시게 되어 집이 이틀 가량 비었습니다. 그 얼마 전 그 중 한 동창의 집에 놀러가 이런 저런 대접을 잘 받았던 게 기억이 나 마음먹고 초대했던 것입니다.

아주 다행히(?) 그 날은 여자가 아닌 남자 후배 한 명이 추가 됐습니다. 여자 동창생 네 명과 남자 두 명. 기혼인 한 명의 후배를 빼곤 아직 결혼은커녕 애인조차 없는 30대의 노총각 노처녀들이 그렇게 모였습니다.

원래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열과 성을 다해' 음식을 마련했습니다. 재료를 다듬고 잘라 놓고 무쳐 놓고 양념에 재어 놓고 쌀은 전날 저녁부터 물에 담가 놓고 등등. 할 일이 많았지만 다행히 입맛에 잘 맞는다며 맛있게 먹어주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돼지고기 볶음. 재료는 간장, 설탕, 마늘, 후추, 사과, 양파, 당근, 버섯, 술 조금. 그리고 참기름.
돼지고기 볶음. 재료는 간장, 설탕, 마늘, 후추, 사과, 양파, 당근, 버섯, 술 조금. 그리고 참기름.나영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고 추억을 함께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자 한 녀석이 쇼파에 벌렁 누우며 "끄응"하고 한숨을 쉽니다.


"어우, 짜증나. 오빠, 나 미칠 것 같애."
"왜, 음식 괜찮다며?"
"맛있어서 너무 정신 없이 먹었더니 배불러서 짜증나."
"……."
"신경질 나 죽겠어. 어우 나 어떡해. 미쳤나봐. 너무 많이 먹었어."

포만감에 나가떨어진 모습을 보며 모두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야, 근데 그러고 보니 추석이 이번 달이네."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한 마디 화두(?)를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몰라아, 난 추석 때 중국 여행가."
"아주 피난을 가는구나. 넌 어디 안 가?"

다른 친구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포옥 하고 한숨부터 내 쉽니다.
"난 큰 일 났어. 엄마가 올 해 안에 시집 안 가면 죽여버린데. 어우, 추석 짜증나. 나도 중국 좀 데려가."

다시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다 질문이 제게 향합니다.

"오빠는? 오빠는 어떻게 해? 오빠는 종손이라 어디 도망도 못 가잖아."
"나야, 음…. 배 째고 누워 버려야지. 맞불 작전으로."

박장대소가 터지고 솔로들의 애달픔이 이어집니다. 친척들 얼굴이 악마로 보인다느니, 아예 말을 못 붙이게 아침 굶은 시어머니 얼굴을 하고 있는 다느니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다들 추석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마무리로 생태찌개. 불을 끈 후 쑥갓을 넣어주면 더 맛 있죠. 이 외에도 샐러드와 골뱅이 무침 등이 제공됐습니다.
마무리로 생태찌개. 불을 끈 후 쑥갓을 넣어주면 더 맛 있죠. 이 외에도 샐러드와 골뱅이 무침 등이 제공됐습니다.나영준
"오늘 음식 너무 잘 먹었다. 우리 다음부터 밖에서 만나지 말고 이렇게 음식 만들어먹자."
"정말, 그렇게 하자. 밖에서 먹어봐야 입맛만 버리는 것 같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 설 때쯤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하고 모두들 수긍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럼 담부턴 우리 집에서 모이자." 유일하게 결혼을 한 녀석이 기분 좋게 나섭니다.
"괜찮을까? 남편이 싫어하는 거 아니지?"
"싫어하긴. 우리 남편이 먹고 마시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데, 형이 와서 수고 좀 해. 음식도 만들고 우리 남편이랑 술도 마셔주고."

음식 칭찬을 많이 하던 녀석이 호호 웃으며 저를 부추깁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술이나 많이 준비해 두세요."
"잘 됐다. 그럼 이제부터 너네 집이 베이스 캠프네."

모두들 푸근하게 웃으며 다음을 기약합니다.

"그런데 우리 다음에 언제쯤 만날까?"
"글쎄, 언제쯤 만날까. 맞다. 추석 연휴 때 만나는 게 어떨까? 10월 2일 토요일. 우리끼리 만나서 추석 때 받은 스트레스 좀 풀자구."
"그래 그게 좋겠네. 추석 땐 눈치 보여서 먹은 게 살로 안 가더라고. 우리 그때도 맛난 거 해 먹자."

모두들 함박웃음을 지으며 첫 눈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합니다.

"난 대하구이 먹고 싶어."
"그럼 새우 살 때 회도 같이 사자."
"해물 된장찌개 어때? 된장 옅게 풀어 넣으면 죽이거든." 저도 한마디 보탭니다.

"좋아, 좋아.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하다. 우리 그 날, 오늘 못 온 사람들도 다 부르자."
"야, 이거 추석연휴에 암울한 인생들만 모이는 거 아냐?"

"깔깔" 웃음 소리가 밤하늘에 웃음이 퍼지며 헤어짐의 인사를 나눕니다. 이번 추석엔 그리 우울할 것만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며 피식 웃음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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