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재미 느끼게 한 재래시장 축제

'재래시장 부활' 꿈꾸는 모래내시장 축제 동참기

등록 2004.09.27 10:23수정 2004.09.2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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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잤다. 아니, 늦잠이 아니라 너무 늦게까지 PC 앞에 앉아 인터넷 바다를 뒤지며 뉴스를 읽거나 버릇처럼 글을 썼더니, 새벽녘에야 잠을 청하게 되었고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거다.


내가 사는 마을은 인천 남동구 구월4동 모래마을. 모래가 많아서 예부터 모래마을이란 이름이 붙었고, 비가 와도 물이 잘 빠져 고개가 진흙밭이 되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래내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a 추석을 앞두고 열린 제1회 모래내시장 축제날의 시장 풍경

추석을 앞두고 열린 제1회 모래내시장 축제날의 시장 풍경 ⓒ 김선영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이 많은 우리 마을에는 재래시장이 있다. 모래내시장과 구월시장이다. 도로를 사이로 두고 구월시장 건너편에 구월주공아파트가 있었는데, 이것이 재개발되어 공사중이다. 몇 년 뒤엔 30층이 넘는 대형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한다.

그 바람에 모래내시장과 구월시장을 이용하던 많은 고객들이 떠나 버렸으니 매출이 많이 줄어든 모양이다. 게다가 몇 년 뒤에 대형아파트가 들어서더라도 그 사람들이 재래시장보다 백화점이나 대형할인마트 등을 선호하게 되면 재래시장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래서 뜻이 있는 몇몇 재래시장 사람들이 모여 재래시장의 부활과 발전을 위한 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서 처음 시장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a '재래시장의 부활'을 기원하는, 40~50대 아주머니들로 구성된 풍물패 공연

'재래시장의 부활'을 기원하는, 40~50대 아주머니들로 구성된 풍물패 공연 ⓒ 김선영

나는 점심 무렵쯤 되어 청바지와 점퍼 차림으로 언덕길을 내려갔다. 제1회 모래내시장 풍물축제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축제 때문일까. 추석을 며칠 앞두고 있기 때문일까. 시장은 여느 때보다 활기를 띠고 있다. 과일가게가 많은 중앙통에서는 과일깎기, 밤까기, 송편빚기 대회가 열리고 있고 50대 아주머니들이 많은 풍물패가 지나가며 풍악을 울린다.

쥐포와 오징어 등 건어물을 파는 젊은 상인은 1일 카메라맨이 되어 바쁘게 돌아다닌다. 조합 사무실 가까운 곳에 가니 할머니 할아버지들(할아버지들보다 할머니 수가 훨씬 많다)이 시장 중앙로에 모여 서 있다.


길 한 편에서 식당 주방 아주머니들이 독거노인과 결식아동, 노숙자들에게 실계란과 실고추 등의 재료가 듬뿍 들어간 맛깔스런 잔치국수를 만들어 대접하기 때문인데, 국수가 담긴 그릇을 서로 먼저 받아가려고 하니 질서가 없다.

a 독거노인들에게 잔치국수를 대접하는 자원봉사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독거노인들에게 잔치국수를 대접하는 자원봉사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 김선영

김성철 조합장을 비롯한 조합 자원봉사자들이 미리 준비한 간이 천막 식당에 앉아 기다리시기를 권하자 그렇게들 하신다. 자리가 모자라 간이 식탁에 앉지 못한 할머니들은 상점 앞 그늘진 데를 찾아가 기다리신다. 일정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어온 고생 많은 세대들, 우리 서민 마을에는 참 많이들 사신다.


a 상점 그늘에 앉아 잔치국수 오기를 기다리는 할머니들

상점 그늘에 앉아 잔치국수 오기를 기다리는 할머니들 ⓒ 김선영

축제에 동참하기 위해서 멀리 용현동에서 오신 두 할아버지와 함께, 모래내횟집에서 서더리탕으로 점심을 먹는다. 소주 한 병을 마시는데, 노래자랑에 나가러 오셨다는 할아버지는 소주를 참 좋아하신다.

"아, 그만 마셔. 노래 해야잖어."
"괜찮어, 이 정도쯤."

친구분이 말리지만 "오늘따라 술맛이 더 좋은 걸 어떡해?"하시는 표정이다. 김기남 가정의학과의원에서는 무료진료 자원봉사를 나왔다. 진료를 받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눈에 띈다.

a 65세 할아버지가 자원봉사나온 가정의학과에서 무료진료를 받고 있다.

65세 할아버지가 자원봉사나온 가정의학과에서 무료진료를 받고 있다. ⓒ 김선영

두 시부터 시작되는 ICN인천방송의 '우리 동네 최고' 녹화장으로 향했다. 시장 정문 가까운 곳에 마련되어 있는데, 임시 관람석인 플라스틱 의자 나르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임시관람석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오전에 같은 무대에서 흘러간 옛 노래로 어르신 위안공연을 펼쳤던 민요가수 황태음씨를 우연히 만나 그에게서 이번에 새로 냈다는 CD 음반 '항구의 불빛'을 선물받는다.

현재는 무대에서 모래내시장 노래자랑이 펼쳐지는 중이다. 모래내시장 상가에 사는 한 할머니는 상품을 받고는 "나, 상 받았어"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하신다. 소주를 좀 마셨던 용현동 할아버지는 붉은 얼굴로 나훈아 노래를 잘 꺾어 부르신다.

곧 개그맨 정귀영씨 사회로 '우리 동네 최고'가 시작되는데, 나는 그 프로그램의 주춘식 PD에게서 예상치 못한 출연 제의를 받는다. "이 마을에 사는 소설가니까 초청 인사로 무대에 올라가 노래 한 곡 불러주시죠?"하는 것이다.

'깜짝 출연'이 되어 무대에 올라간 나는 "부르실 제목이 뭐죠?"하는 사회자 질문에 "제목이 생각 안 납니다"했다가, "할머니 눈을 보니까 생각납니다"하고 능청을 떨고는 배호의 '황금의 눈'을 불렀다.

마지막 소절 "아아아, 황혼길에 불타오른 마지막 정열"에서 '정열'을 특히 강조하여 불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정열적으로 사세요"하는 외침이 담겨 있었던 거다. 그러고는 전국의 재래시장이 힘껏 살아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모래내시장 만세!"하고 외쳐주었다.

a 몸짱 엄마들과 몸짱을 꿈꾸는 딸들이 함께 춤 솜씨를 뽐냈다.

몸짱 엄마들과 몸짱을 꿈꾸는 딸들이 함께 춤 솜씨를 뽐냈다. ⓒ 김선영

모래마을 어린이들의 장기자랑이 너무도 귀여웠다. 주민들의 노래자랑 사이사이에 곁들여진, 마을 초등학생들이 펼치는 태권도 춤과 격파 시범(지도사범 민문정 5단), 몸짱 엄마들과 "몸짱을 꿈꾸는" 딸들이 어울려 펼치는 댄스공연들이 맛을 더했다.

특히 미취학 아동들의 막춤은 관객들의 박수를 가장 많이 받았다. (이어지는 다른 무대에서는 모래마을 청소년 댄스경연대회, 모래마을 초등학생 합창 공연도 있었다.)

a 마을 장기자랑에 태권도가 빠질 수 있나요?

마을 장기자랑에 태권도가 빠질 수 있나요? ⓒ 김선영

초청가수로는 섹스폰 연주를 섞어 부르는 '딱 걸렸어'의 오선녀, 이성우, 한송희씨가 나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흥겹게 했다.

a 초대가수 오선녀씨가 자신의 히트곡 '딱걸렸어'를 부르고 있다.

초대가수 오선녀씨가 자신의 히트곡 '딱걸렸어'를 부르고 있다. ⓒ 김선영

덩치가 대조적인 요크셔테리어와 알래스칸 맬러뮤트도 할머니, 아저씨와 함께 각각 구경꾼으로 나왔는데, 예쁜이 요크셔테리어는 "나도 노래 잘할 수 있다구요!"하고 심통난 표정이었다.

a "나 같은 이쁜이를 왜 무대에 안 올려보내 주는 거지?"

"나 같은 이쁜이를 왜 무대에 안 올려보내 주는 거지?" ⓒ 김선영

축제 자원봉사도 하고 노래자랑에도 참가했던 모래마을 사람이 나한테 막걸리 한잔 산다고 한다. 길카페(이름이 그럴싸한 이 집이 실은, 막걸리 한 사발 1000원에 돼지껍데기 안주가 공짜로 나오는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서민 스스로 분위기를 만드는' 왕대폿집이다)에 들어가니, 오선녀씨가 옆 식탁에서 일행과 막걸리 한잔 하며 "술 안 마시는 사람 매력 없어요"하고 말한다. 나처럼 없는 주제에 말술을 마셔선 안 되겠지만.

막걸리 기운을 좀 식히려고 모래마을과 복개천을 거닐어 본다. 늘 그렇듯이, 어린이 놀이터가 눈에 띄면 긴 나무의자 한 편에 앉아 어린이들 뛰어 노는 것을 본다. 태권도 시범을 한 아이들은, 18시부터 시작되는 도장 훈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열심히 뛰어 놀고 있다.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탄다.

다가구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민 동네 모래마을 아이들, 고층아파트가 부럽지 않은 모양이다. 어른들은 어렵게 마련한 내 집을 은행 경매로 빼앗길까봐 불안하지만 어린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 이렇게 있으니까, 할머니 손잡고 값 싸고도 맛있는 것 사러 갈 재래시장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a 태권도 시범을 끝내고 마을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모래마을 아이들

태권도 시범을 끝내고 마을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모래마을 아이들 ⓒ 김선영

모래내시장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짐을 나르고 하면서 펼친 제1회 모래내시장 풍물축제, 마을 어르신들에게 잘 만든 잔치국수를 대접해 드리고 채널5번 지역방송 공연까지 펼쳐드렸으니, 한편으로는 어르신 위로잔치나 마찬가지인 '효도 축제'가 된 셈이었다.

"모래내시장 만세!"

언덕을 오르며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를 감상하다가, 아까 무대에서 갑자기 그렇게 외친 것이 생각나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훈훈한 인정이 오가는 재래시장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 나 역시, 이제는 영락없는 시장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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