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상자 속에 넣어 버렸습니다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28)

등록 2004.09.27 13:11수정 2004.09.2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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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학교 선배가 심각한 표정으로 혼잣말 하듯 이야기하였다.


"에이, 컴퓨터를 없애버리든지, 아니면 누구 줘버리든지..."
"컴퓨터가 무슨 죄가 있다고 웬 화풀이예요?"

나는 얼핏 애들과 관련된 문제일 거라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참았던 얘기보따리를 풀어놓듯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컴퓨터에 대한 안좋은 기억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컴퓨터에 대한 선배의 그동안의 기억은 한마디로 애들 공부를 망치는 요물덩어리였다. 선배가 말한 선배 아들과 컴퓨터에 관한 이야기는 이랬다.

얼마 전 옆 집 친구네 컴퓨터를 보고 부러우면서도 내색조차 안하던 아들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해서 선배는 큰 맘 먹고 최신 기종의 컴퓨터와 프린터를 구입해서 아들 방 책상에 올려놓고 초고속 인터넷도 깔아주었다. 당연히 아들은 너무 좋아했고 얼마동안 더욱 착실해져서 엄마를 기쁘게 했다.

늦잠 자는 선배 아들이 새벽에 컴퓨터를 본 이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차츰 선배아들은 늦잠을 자는 횟수가 잦아졌고 기운이 없어 보였으며 성적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선배는 혹 몸이 약해졌나 싶어서 보약도 먹여보고 병원에 가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원인을 알 수 없던 차에 어느 날 새벽 4시 우연히 불이 새어져 나오는 아들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까지 잠도 자지 않고 모니터 화면에 열중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던 아들은 깜짝 놀라 모니터를 꺼버리더라는 것이다.


선배는 도대체 아들이 무엇을 봤을지 매우 궁금했다. 나는 선배의 궁금증도 풀어줄 겸 아이의 컴퓨터 사용 취향을 알아볼 겸 해서 아들이 새벽에 인터넷으로 보았던 것을 쿠키에 저장된 기록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간단하게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아들이 눈치 채서 기록을 지우지 않도록 조심해서 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런 후 선배가 다시 찾아왔기에 아들이 새벽에 보았던 기록을 찾아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선배 좀 뜸들이더니만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때 새벽에 아들이 본 내용이 낯뜨거운 동영상이었노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사춘기 아이들이라면 특히 사춘기 호기심에 그런 것 한번쯤 볼 수 있는 거라며 선배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런 횟수가 잦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느 정도 통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직접적으로 현장을 발각해 야단치는 거나 컴퓨터 자체를 못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엄마도 컴퓨터를 할 수 있고 아이들 스스로가 지금 컴퓨터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인식을 은연중 심어주어서 아이들 스스로 엄마가 좋아하지 않는 일은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와 이메일이나 메신저 대화, 아니면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주기적인 대화를 시도해보라고 했다. 대화 속에 지난 번 아이가 보았던 내용에 대해 엄마의 느낌과 생각을 솔직히 적어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방법이 좋은 것같다고 말이다. 그런 후 수시로 아들이 인터넷으로 뭘 보았는가를 기록으로 찾아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홧김에 상자 속에 컴퓨터를 넣어두다

얼마 전 또 그 선배를 만나게 되었길래 아들의 근황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선배는 몰래 음란물 보는 횟수는 줄어들었는데 대신 온라인 게임에 미쳐 지낸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만 돌아오면 가방을 내팽개쳐둔 채 게임을 하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게임을 못하게 야단도 쳐봤지만 그때뿐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컴퓨터를 없애버리겠다던 선배는 너무나 화가 나 컴퓨터를 상자 속에 다시 넣어 골방에 넣고 문을 잠궈버렸다고 한다.

나는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선배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 세상의 아이들을 컴퓨터와 격리시켜버리는 행동은 그다지 바람직해보이지 않았다. 결국 선배의 기분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다.

"잘했어요. 언니, 그렇지만 요즘 애들을 너무 컴퓨터와 격리시켜놓는것도 그다지 바람직한 방법은 아닌 것 같거든요. 또 너무 격리시키다보면 애가 엄마 몰래 게임방 같은 데서 겉돌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냉각기도 가질 겸 그렇게 며칠 있다가 애가 좀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면 다시 꺼내서 애공부방이 아니라 거실에 설치해두세요."
"거실에? 거실에 컴퓨터를 놔두어서 뭐할 건대."

선배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아이의 컴퓨터 사용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의 일종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이에게는 네가 컴퓨터가 필요한 만큼 엄마 아빠 또한 컴퓨터가 필요하다며 컴퓨터는 온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가족 모두의 컴퓨터 사용시간을 정해두세요. 예를 들면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아빠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엄마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아이가 사용하는 시간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사용 시간 외에는 부모만 아는 비밀번호로 윈도 자체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세요. 아마 그런 방법이 컴퓨터를 상자 속에 처박아 놓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 같네요."

선배는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럴까, 그런데 나는 컴퓨터를 잘 할 줄 모르는데 그 시간에 뭘 하지."
"왜 할 일이 없어요. 가계부 프로그램으로 가계부도 매일 정리하고, 신문기사도 스크랩하고 일기도 쓰고 메일도 보내고 이런 저런 정보도 검색하면 1~2시간을 금방 지나가지요."

결국 선배는 나의 얘기를 다 이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고 며칠 전 그 선배에게서 다음과 같은 전화를 받았다.

"나야, 니 말대로 컴퓨터 거실에다 놓았다."
" 잘됐네요. 그래, 아들은 어때요?"
"여전히 게임하고 싶어하지 뭐, 그런데 이제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엄마 아빠 컴퓨터 하는 시간으로 알고 지가 컴퓨터를 쓸 시간까지 숙제나 다른 걸 빨리빨리 해치우더라, 게임하는 시간도 차츰 지가 알아서 조절하기도 하고."

난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언니는 컴퓨터 많이 배웠구요."
"응, 그럭저럭... 그런데 말이다. 온라인 고스톱 참 재미 있더라. 고스톱 하다보면 한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거든... 애들이 그렇게 왜 게임을 좋아하는지 이해도 되고 말이지..."

난 선배와의 전화를 끊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 게임중독 막으려다가 배우게 된 고스톱게임에 정작 선배가 게임에 빠져 또 다른 조절이 필요하게 되는건 아닐까?

뭐든지 적당하게 알고 뭐든지 할 줄 아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애들이나 어른들이나 조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적당히 컴퓨터를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기인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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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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