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땅에서 한국인 지장보살을 만나다

옛정취 찾아 떠난 상해, 항주, 소주여행 (4)-영은사

등록 2004.10.02 09:15수정 2004.10.0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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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비래봉의 석불들(1)

비래봉의 석불들(1) ⓒ 김정은

서호 서쪽 북고봉 기슭에 세워져 있는 영은사는 중국 선종의 10대 사찰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일찍이 동진시대에 인도의 승려 혜리가 창건했다는 이 사찰은 한때 신도수가 3천명에 이르는 큰 절이었으나 건립 후 역사적으로 총 14번의 훼손을 거쳐 오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만큼 시련을 많이 겪은 절이다.

그 중 가장 피해가 컸던 때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서였다. 이런 저런 파괴와 훼손 끝에 "영은사는 인민의 재산이므로 보호해야 된다"는 주은래의 최종 결정 덕분에 지금의 모습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영은사를 보니 갑자기 쓴 웃음이 나온다. 만약 문화대혁명 당시 낡은 문화를 타파하겠다며 몰려든 홍위병들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다면 지금 이렇게 조상 덕으로 외화 벌이를 할 수 없었을테니…. 한마디로 제 밥그릇 지가 깨트리는 실수를 저지를 뻔한 것이 아닌가?

무슨 사상이든지 아무리 처음 출발은 순수한 동기였다고 하더라도 너무 편향적이고 외골수이다 보면 스스로의 오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발전하지 못하고 도태되어버린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이라고 자화자찬을 했던 문화대혁명은 그 급진성과 편향성 때문에 생긴 많은 부작용의 상처만을 남겨놓은 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죽하면 중국 공산당 스스로도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며, 그의 책임이다"라고 규정하였을까?

한 인간이 각자 지니고 있는 사상이나 느낌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표출하고 나름대로의 합의나 의견조정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를 넘어서 일률적인 강압을 통해 자신의 생각대로 획일적으로 뜯어고치거나 재단하겠다고 덤벼든다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치졸한 행위인가? 한 인간의 단순한 아집과 교만으로 태어난 순진한 실험,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영은사 정문을 통과했다.

친근하고 소박한 미소를 지닌 비래봉의 석불


a 비래봉의 석불들(2)-두손을 합장한 채 뭔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같은 관음보살, 비록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보일 듯말 듯한 미소는 찾을 수 없었지만 외지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비래봉의 석불들(2)-두손을 합장한 채 뭔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같은 관음보살, 비록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보일 듯말 듯한 미소는 찾을 수 없었지만 외지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 김정은

정문을 들어가니 왼쪽에는 작은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338개의 각종 불상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비래봉(飛來峰)이 보인다. 인도의 영취산과 닮았다고 비래봉(飛來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야트막한 작은 봉우리이지만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여 있는 중간 중간에 이름 모를 아담한 부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일설에는 외부에서 날아온 이 곳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런 저런 불상들을 조각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우리나라의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 이야기가 연상되면서 꾸미지 않는 소박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마치 경주의 남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분위기의 암벽 곳곳에는 영은사의 거대한 건물과 불상들과는 달리 소박하지만 서민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를 지닌, 오대(五代)와 송나라, 원나라의 석불 약 330여기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의 남산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남산의 불상들은 뒤죽박죽 자연스럽게 배치된 각기 다른 양식의 불상의 모습에서 정리 안된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반면 이 비래봉의 조각들은 각각의 제작연대는 다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통일된 형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후주 때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삼존불상을 필두로 하여, 배가 볼록 튀어나온 모습의 달마상과 두 손을 합장한 채 뭔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 같은 관음보살은 이방인에게 친근함을 자아내는 불상이었다. 비록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는 찾을 수 없었지만 외지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곳이었다.

a 이공지탑 아래에서 인상적인 빨간모자를 모두 쓰고 단체사진을 찍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공지탑 아래에서 인상적인 빨간모자를 모두 쓰고 단체사진을 찍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 김정은

시간 관계상 아쉬운 발길을 돌리려는 차에 저만치 혜리스님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이공지탑(理公之塔)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탑 자체보다는 그 탑에서 사진을 찍는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의 모습이 더 이채로웠다.

관광회사 로고가 들어간 굉장히 인상적인 빨간색 모자를 모두 통일해서 쓰고 즐거운 듯 미소를 지으며 단체 사진을 찍는 그들의 모습이 언뜻 과거 우리나라의 초기 단체관광의 모습과 흡사해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이곳도 개방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보다 여유로워진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이제 막 관광업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덩샤오핑(등소평)이 떠오른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며 개방을 시작했던 그, 세월은 흘러 지금 보통 중국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개방의 열매는 과연 어떠할까?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달콤했을까 아니면 나름대로 씁쓸했을까? 지금 저 탑에서 미소 지으며 사진을 찍는 빨간 모자의 주인공들만을 본다면 우선은 달콤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왕전과 운림선사

a 천왕전 내부에 우리나라 사천왕상보다 10배는 더 커보여 무섭기조차 한 사천왕상의 모습

천왕전 내부에 우리나라 사천왕상보다 10배는 더 커보여 무섭기조차 한 사천왕상의 모습 ⓒ 김정은

한참을 걷다보면 천왕전이 나온다. 천왕전에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우리나라 사천왕상보다 10배는 더 커 보여 무섭기조차 한 사천왕상 말고도 청나라 강희제가 썼다는 운림선사란 편액이 흥미를 끈다.

청나라 강희제는 강희자전을 편찬했을 정도로 만주족으로서 한족의 문화에 조예와 관심이 많은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항저우에 놀러와 영은사를 방문했는데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주지 스님이 갑자기 강희제더러 현판 글씨를 부탁했다. 그런데 강희제는 간밤에 과음을 했던지 그만 첫 글자인 영(靈)을 못써서 운(雲)이라고 썼다고 한다. 난처하게 앉아 있던 강희제를 보고 옆에서 한 신하가 그 다음 글자를 림(林)이라고 넌지시 말해서 운림(雲林)이 되었고 선사(禪寺)를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한자 하나 제대로 못쓰는 만주족을 비웃기 위한 의도인지, 강희제의 임기응변을 칭찬하기 위한 의도인지는 아리송하나 순전히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강희제의 임기응변에 대한 칭찬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우선 '운림선사'라는 이름 자체는 이름 속에 선종사찰이란 느낌도 은연중 나타나면서도 영은사보다 낭만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영은사와 운림선사, 이런 규모의 사찰에 낭만적인 별호 하나쯤 있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

한국인 지장보살 김교각과 신라 보천태자

a 총 높이 19.6m의 엄청난 크기의 석가여래 목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대웅전의 모습,  높이가  33.6m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총 높이 19.6m의 엄청난 크기의 석가여래 목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대웅전의 모습, 높이가 33.6m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 김정은

천왕전을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가면 금빛 석가여래 불상이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다. 규모가 너무 커서 올려다보기도 힘든 이 불상은 귀 하나의 길이만 해도 2m나 된다는 총 높이 19.6m의 엄청난 크기의 목불상이다. 당연히 이 거대한 목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대웅전의 높이 또한 33.6m로 천장이 까마득할 만큼 높다.

워낙 불상이 크다보니 그곳에 앉아 참배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왠지 모르게 서슬퍼런 위압감이 느껴지면서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중생에게 다가가려면 한없이 가까워져야 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명제일텐데…. 이 절의 불상은 하나같이 중생들이 올려보아야 할 정도로 위압감을 주니 아무리 큰 걸 좋아하는 중국인의 성향이라 하더라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웅전 뒤에는 설산에서 수도하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의 석가모니를 맨 위로 하여 각각의 위치에 차례대로 500보살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이 있다.

그 조각상 중에 내 눈을 끄는 것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높은 곳에 새겨진 지장보살이었다. 지장보살의 모습이 우리나라 절에서 보는 지장보살의 모습과 다를 뿐 아니라 왠지 보통 한복을 입은 사람모습처럼 보였다.

알고보니 이곳 중국에서는 지장보살의 경우 서천의 지장보살을 섬기지 않고 실존승려를 서천의 지장보살의 환생으로 여겨 섬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중국인들이 그토록 지장보살의 환생으로 섬기는 그 사람이 바로 당나라 때 신라에서부터 건너와 구화산에서 득도한 김교각이라는 한국인 스님이라는 것이다.

a 관음보살 바로 위 중앙에 조각되어 있는 지장왕보살 김교각스님

관음보살 바로 위 중앙에 조각되어 있는 지장왕보살 김교각스님 ⓒ 김정은

696년 신라 33대 성덕왕의 아들이라고 알려진 김교각(金喬覺)은 불도를 닦으려고 바다를 건너가 해발 1300m의 구화산에 올라가 75년 동안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수행하다가 804년 가부좌를 튼 채 99세의 나이로 열반하였는데…. 3년 동안 항아리에 모셔두었던 시신이 하나도 썩지 않고 입적할 당시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결가부좌 상태 그대로인데 놀라 제자들은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육신에 금물을 입혀 육신탑을 세워 모셨다고 한다. 그 후부터 중국의 사찰에는 지장보살 대신 김교각 스님을 지장보살로 모신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구화산에서 김교각 스님과 조우했던 시인 이백은 <지장보살찬(地藏菩薩贊)>이라는 시에서 김교각을 지장보살에 비유하면서 "보살의 자비로운 힘 무변고해 구하나니, 하해같은 그 공덕 세세손손 빛내리로다"라고 하여 그를 찬양할 정도로 살아있을 때도 그는 생불로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가 수도했던 구화산은 오대산, 보타산, 아미산과 함께 불교의 4대성지로 알려져 있다.

이국땅인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떠받들고 있는 대단한 한국인 스님,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그의 자취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해 하던 중 혹 지난번 성류굴과 오대산 전설에서 잠시 나왔던 삼국유사 '명주(溟州)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의 주인공 보천태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일설에 보천태자가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왕보살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면 맞는 것도 같은데 결정적으로 성덕왕의 형인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어떻게 성덕왕의 아들로 와전되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보천태자와 김교각에 대한 의문에 대해 생각하며 걷다보니 약사전의 12지 신상과 오백나한전을 지나 다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a 높이 더 높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하늘을 향해 올라가 한껏 올려져 있는  위압적인 기와의 선, 문득 하늘과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살짝 올려진  우리 기와 곡선의 유려함이 그리워진다.

높이 더 높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하늘을 향해 올라가 한껏 올려져 있는 위압적인 기와의 선, 문득 하늘과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살짝 올려진 우리 기와 곡선의 유려함이 그리워진다. ⓒ 김정은

높이 더 높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하늘을 향해 올라가 한껏 올려져 있는 위압적인 기와의 선과 이층 삼층의 거대한 건물들과 불상들...

분명 우리나라의 사찰에 비해 규모만 따져본다면 10배는 더 커보였다. 처음에는 그 거대한 규모에 놀라움의 탄성을 질렀지만 자꾸만 보다보니 그 규모와 부자연스럽게 높이 올라간 기와 선 자체가 약간 부담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자가 스스로의 재력을 과시하는 듯 화려하게 만든 각종 등보다는 한 끼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살기 힘든 가난한 여인이 하루 양식꺼리 대신 정성으로 피운 초라한 등잔 불빛이 거센 바람에도 유독 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정녕 믿음의 깊이가 불상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 아닐진대 꼭 그토록 크게 만들 필요가 무엇이었을까? 그냥 넓은 땅덩어리이다 보니 그 규모에 자연스럽게 맞추기 위한 의도였을까? 문득 하늘과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흐르다가 살짝 올려진 우리기와 곡선의 유려함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걸 보면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 구경을 끝내고 나오면서 내 머리 속에 한동안 남은 건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밀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의 모습이었다.

a 향을 사르며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중국인들,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 이상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 나라는 분명 변화하고 있었다.

향을 사르며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중국인들,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 이상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 나라는 분명 변화하고 있었다. ⓒ 김정은

분명 중국은 변화하고 있었다.

빨간 모자를 통일해서 쓰고 관광기념 단체사진을 찍는 중국인의 미소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한뭉텅이의 중국향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정성껏 기원한 후 대웅전 밖 마당에 따로 설치해 놓은 향로에서 경건한 모습으로 향을 불사르는 참배객의 모습에서, 그 변화의 징후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 나라, 개방을 시작한 79년부터 20년간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을 바탕으로 추구한 상하이 등 동부 연해지역을 중시하는 '불균형 발전정책'에 이어 2001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서부개발을 통해 지역간 격차를 줄이고 중국 전체의 균등발전을 꾀하고자 하는 이 나라, 과연 이 나라는 2050년까지 모든 중국국민들을 중류 이상으로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변하고 있는 중국, 그보다는 변하려고 노력하는 중국의 모습에 이웃나라의 국민으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하늘을 향해 한없이 솟구쳐 오르려고만 하는 기와선과 영은사의 위압스런 불상들에게서 무심코 느낀 당돌한 도전의식이 어디로 튈지 모를 불안감 때문일까?

어느덧 자동차는 중국 최고의 차로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용정차밭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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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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