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가리에 병아리와 어미닭을 함께 가뒀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김규환
"야들아 울 엄니가 근디 어젯밤 성렬이집 닭을 *쌀가지가 죄다 물어가부렀댜."
"그 집은 대밭이 가까운께 그럴 만도 하제."
"닭장 문단속을 좀 소홀히 헝께 글지."
집집마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을 무렵 작게는 이삼십 마리에서 백여 마리까지 병아리를 깨서 애지중지 기른다. 비실비실 자올자올 졸면 고추장에 밥을 비벼서 주면 먹는 놈은 살아남고 그도 받아먹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차차 고양이 밥이 되어 한두 마리 줄어간다. 아래채 행랑에 있는 닭장은 밤새 타는 고랫재 연기에 질식해 싸늘하게 죽어 있다.
욕심 많은 족제비나 살쾡이도 포식자다. 요놈들이 제들 먹을 것 한두 마리만 채가면 그만인 것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고 가질 않나 한꺼번에 서너 마리를 물고 가니 마당을 지나 담을 타고 넘는 길목엔 닭털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흔히 욕심꾸러기를 말할 때 '대밭쪽제비'라고 한다.
목숨을 부지한 닭은 초복 중복 말복을 넘기면 장수의 길로 접어들지만 추석을 쇠고 나면 집마다 열 마리 내외로 급격히 줄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 바쁜 틈을 타서 매가 동네 상공을 유유히 날다가 공습을 감행하면 "꽥꽥" 소리를 지른 후 가보면 한 마리는 온데간데없다.
만추에 가까우면 아이들 몸에 기름기가 죄다 빠져나가 밀려드는 일에 허기가 더 몰려왔던 시절, 밤은 왜 그리 길었던가. 해지면 밥 먹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바쁜 지난날 시골 생활이 결코 따분하지만은 않다.
서리의 연속이었다. 그 아름답기만 했던 서리문화로 아이들은 추억을 만들었고 한국공통 문화의 하나가 서리다. 복숭아서리 수박서리 참외서리 콩서리 김칫독서리에 닭서리와 오리서리에 오곡밥 시루 서리까지 책상 빼고 모두 서리 대상이었다.
밤이 더 깊어지길 기다리며 궁리를 한다. 감행 1조는 닭을 서리해 오는 임무를 맡았고 2조는 다소 수월한 솥단지와 쌀, 그릇을 챙기고 동무들이 돌아오는 동안 마늘도 까놓는다. 1조는 닭장에 들어가 "고고" "가르륵 가르륵" 고요히 자고 있는 닭을 "꽥" 소리 한번 나지 않게 목을 비틀어 털 하나 빠지지 않게 쥐도 새도 모르게 들고 오는 것이 관건인지라 민첩함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했다간 말짱 도루묵 되거나 다음날 닭 주인에게 다리몽댕이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닭구똥이 좀 묻는 게 흠이지만 스릴 만점이다.
"야 근디 오늘은 누구 꺼 잡으끄나?"
"가만 있어봐봐 내가 본께 석주 형 집이 밤잠이 깊어. 여차하면 대밭으로 튀어도 알 턱이 없응께 그리 가자."
"좋다. 오늘은 용기 집이다."
셋만 밖으로 나왔다. 동네 개 한 마리가 짖자 여기저기서 응대하느라 몇 번 컹컹 짖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하얀 밤 구름만 서서히 움직일 뿐 마을은 적막하다.
용기네 사립문을 통과하여 살금살금 기었다. 마침 그 집엔 개가 없었다. 밖에서 한 명은 망을 보고 병섭이와 함께 머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솜씨만 발휘되면 식은 죽 먹기다. 닭은 바깥 엇가리에 있지 않았다. "고르륵 고르륵" 골골거리며 달빛을 받으며 횃대에 올라 잠을 잔다. 씨암탉은 남기기로 했다.
"쉿!" 소리도 없이 손가락으로 시늉만 했다. 다리가 만져졌다. 제법 듬직했다. 그 때까지는 모른다. 죽지를 더듬어 닭 모가지를 홱 돌려주니 "꽥"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내 품에 안겼다. 부리나케 닭장을 빠져 나와 발소리 죽여 사립문을 나와 한 손에 비튼 닭을 잡고서 동네 어귀로 튀었다. 대성공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한 바퀴 더 돌려주자 숨이 멎었다. 셋이서 제일 억센 날개 죽지에서 시작하여 잔털이 많은 목덜미 털을 죄다 뽑았다.
"야, 지푸라기 쫌만 빼와라."
몇 올 남지 않은 털을 제거하고 쫄깃한 고기와 고소한 맛을 내려고 막판에 짚불로 그슬린다. 이런 때를 위해 어른들로부터 닭 잡는 방법을 배워둔 시골아이들은 영특하다. 최고의 맛을 내려면 연기나지 않은 짚으로 태워야 한다. 슬슬 돌리며 그을리자 털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대충 태우고 물에 씻어 동무들이 모여 있는 후배 녀석 집으로 갔다.
"왜 이리 늦었냐? 한 놈 *폴새 잔다."
"솥단지랑 마늘 쌀 씻어 놨제?"
"하먼."
배를 따고 밥통과 내장을 끄집어 내 두엄자리에 묻어버렸다. 모래주머니만 안쪽 껍질을 벗기고 기름소금에 찍어서 나눠 먹으며 닭살을 난도질했다. 마늘과 참기름을 섞어 버무린 잘게 썬 살을 넣고 푹푹 끓였다. 물은 한강수다. 김이 나자 쌀을 넣고 한소끔 푹 퍼지도록 삶았다.
"야야…그릇."
다들 실실 밀려오는 잠에 뉴캐슬병 걸린 듯 힘이 없다. 어깨를 툭 치며 깨우자 정신이 들었는지 세상에서 제일 맛난 닭죽에 숟가락 하나씩을 쥐어 든다. 양푼에 한 그릇씩 퍼주자 졸며 한 그릇씩 뚝딱 비운다. "훅훅" 달콤한 죽을 빨고 얼버무려 쫄깃한 살을 씹는다.
"또 없냐?"
"얌마 작작 쳐묵어라. 낼 잽히면 니가 다 뒤집어 써야 한다. 알았지?"
"잉."
만사가 귀찮은 듯 건성이다. 1시가 넘었으니 맥이 풀리는 건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다음날 우린 며칠 간 집 밖 출입을 삼갔다. 용기 아버지 어머니는 살쾡이나 족제비의 소행으로 알았을까? 아니면 우리보다 연배가 위인 형들이 벌인 잔치로 보았거나 단 한 마리 없어졌으니 눈감아 줬는지도 모른다. 만약을 위해 우린 그 뒤론 친구나 후배를 끼고 서리를 자행하였다.
고기 맛을 터득한 우린 냇가에 오리만 보면 돌팔매질을 일삼았다가 결국 한 마리를 잡는 성과를 올렸지만 간덩이가 붓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쌀가지: 살쾡이
*폴새: 벌써,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