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도 가을이 찾아들기 시작했다김비아
금강산에서 꿈 같은 일박 이일을 보냈다. 육로 관광이 시작된 지 일년여 만에 드디어 북한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세상 어떤 땅보다도 더 멀어 보였던 그곳은 그렇게 지척에 있었다. 먼 것은 인간의 마음이지 땅이 아니었다.
새벽 여섯 시, 고성 금강산 콘도에서 관광증을 받은 우리 가족은 민통선을 지나 통일 전망대 근처에 있는 동해선 출입국 사무소에서 수속을 밟고 배정받은 버스에 올랐다. 비무장지대의 철조망과 그 너머 북녘 땅을 눈 앞에 두고 마음은 다소 긴장되었다.
출발 전에 직원 분으로부터 여행에 필요한 설명을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남북이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광 지구 내에서는 ‘북한, 남한’이란 용어 대신에 ‘북측, 남측’이란 용어를 사용해달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차 안에서는 일체의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고 했다. 나는 마음에 고이 담아가기로 했다.
드디어 출발하여 비무장지대에 접어들었다. 군용도로를 따라 가며 보이는 ‘지뢰 위험’라는 표지판이 여기서 죽어간 수많은 넋들과 여전히 생생한 분단의 아픔을 환기시켰다.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각각 2km씩 두게 되어 있지만, 북측이 1.2km를 내려오고 남측이 0.8km를 올라가는 바람에 실제로는 2km라고 한다.
버스는 금세 남방한계선을 지났고, 군사분계선을 알리는 녹슨 철 표지판을 지나 드디어 북측 비무장지대에 들어섰다. 북방한계선을 통과하자 진한 밤색 군복을 입은 북측 군인들이 나타났다. 버스는 잠시 정차했고 인민군 장교 두 명이 올라와서 인원 점검을 했다. 사뭇 떨리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몇 겹의 장벽을 통과해야 했지만, 우리가 가는 길 옆으로 철길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해북부선’이 이미 연결되어 있었고 철로 주변으로 보수공사를 하는 북측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철로는 원산까지 연결되어 드넓은 러시아 땅과 만난다. 냉전 세력이 아직까지 한반도에서 큰 소리를 내고 있는 동안에도, 철길은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역사도 그렇게 전진하고 있었다.
길 옆으로 보이는 풍경은 다소 이국적이었다. 약간 흐린 하늘 아래 낙타봉(구선봉)을 비롯해서 연이은 바위산들과 나무가 전혀 없는 주변 야산들의 모습은 삭막해 보였다. 6·25 때 치열한 전투로 나무가 모두 불탔다고도 하고 여기가 해안이다 보니 군사적 목적에서 나무를 모두 베어서 그리 되었다고도 한다.
황량한 바위산들을 벗어난 버스는 남강 다리를 지나 계속 달렸다. 남강은 남에서 북으로 흘러들어 동해로 빠져나간다. 관광도로 옆으로는 연두색 철책이 있는데 관광지역과 북측 마을의 경계였다. 우리는 그 안으로만 다닐 수 있다. 강물은 남과 북이 없이 흐르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그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길이 열린 것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철책 너머로 북측 마을도 보이고, 북측 사람들이 다니는 도로도 보였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가는 북측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몇 십 년 전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전해오는 상팔담
출발한 지 약 한 시간 만에 우리는 고성항(장전항)에 있는 북측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했다. '반갑습니다'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고 내 마음도 한결 푸근해졌다. 사무소 가까이 호텔 해금강과 펜션 타운이 보였다. 수속을 밟고 온정각으로 향했다.
온정각은 금강산 관광 지구의 센터 구실을 하는 곳이었다. 식당 예약은 물론이고 코스 관광을 위한 셔틀 버스가 모두 온정각에서 출발한다. 아침을 못 먹었던 터라 우리는 온정각 식당에서 간단히 우동을 들고는 곧바로 구룡연으로 가는 셔틀 버스에 올랐다.
구룡연 코스는 금강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 왕복 네 시간의 완만한 코스였다. 설악산 계곡과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훨씬 맑고 깨끗하다. 금강문을 통과하면 옥류동 계곡과 연주담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의 담과 소는 진한 옥색빛을 띠고 있는데, 선녀가 목욕을 하다 옥가락지를 빠트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물색이 얼마나 푸르렀는지 그냥 물에 첨벙 뛰어들고만 싶었다. 아버지는 "한번 뛰어들고 벌금 백 달러 낼까"하며 농담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