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가 바로 이 빛깔이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38) 생쪽 물들이기

등록 2004.10.04 20:56수정 2004.10.0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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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색의 조화


a 명주에 생쪽 물을 들이다

명주에 생쪽 물을 들이다 ⓒ 박도

이른 아침, 아내가 뒤뜰에서 불렀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곧 서리가 내릴 것 같다면서 뒤뜰에 심은 쪽 풀을 베어 옷감에 물을 들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구니와 낫을 가지고 와서 쪽 풀을 베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내 글에서 자기 얘기가 나오는 것을 몹시 꺼렸다. 글쓴이들이 별 것 아닌 일을 가지고도 배우자 얘기를 잔뜩 늘어 놓는 게 보기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 탓인지 내가 꽤 여러 권의 책을 내면서도 아내 이야기는 별로 쓰지 않았고, 꼭 써야할 경우도 단역 처리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내 친구나 후배로부터 자기 부인을 푸대접한다고 항의도 몇 차례 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 안흥 산골에서 단 둘이 지내게 되니, 여기로 온 뒤로는 아내 얘기를 빼 놓으면 얘깃거리가 없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영역은 거의 간섭치 않는다. 솔직히 나는 아내가 뒤뜰에 쪽을 심은 줄도 몰랐다.

오늘에야 아내로부터 들은 말인즉, 지난 봄 전남 보성에서 천연염색 전문가 무색씨에게 쪽 씨앗을 얻어다가 시험 삼아 뒤뜰에 뿌렸다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강원도 지방에서는 위도상 잘 안 될 거라고 부정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a 쪽 풀과 잎

쪽 풀과 잎 ⓒ 박도

그런데도 쪽은 잡초더미 속에서도 40~50cm씩 잘 자랐다. 그 놈을 베어다가 바구니에 담은 뒤 아내와 함께 잎을 따서 플라스틱 대야에 담았다.

a 쪽잎을 따고 있다

쪽잎을 따고 있다 ⓒ 박도

아내는 다 따낸 쪽 잎을 물에다가 깨끗이 씻은 다음, 손으로 짓이겨 고운 망에 넣고는 스테인레스 대야 안에서 주물럭거리며 쪽물을 우려냈다.


아내는 더 좋은 쪽물을 들이려면 찬물에다 우려내야 된다면서(고온이면 제 빛깔이 나지 않음) 냉동실에서 꽁꽁 언 물병을 대야에 담가 놓고 계속 고운 망 속의 쪽을 짓이겼다. 스테인레스 대야는 이내 초록의 쪽물로 가득 찼다.

아내는 깨끗이 정련한 명주를 꺼내 쪽물에 담갔다. 곧 명주 천에는 쪽물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나는 글에서 걸핏하면 '쪽빛 하늘' '쪽빛 바다'라며 쪽빛이라는 말을 썼다. 교단에서는 학생들에게 '청출어람(靑出於藍: 푸른 물감은 쪽 풀에서 뽑아낸 것이나 그보다 더 푸르다. 스승보다 제자가 더 뛰어남을 이름)'이라는 고사성어를 숱하게 가르쳤지만 한번도 쪽이나 쪽물이 드는 현상을 보지 못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에야 뒤늦게 그것을 체험한다. 정말 신기하게 쪽물에 든 명주는 '쪽보다 더 푸른 빛'을 띠었다.

아내의 손끝에 따라 여러 가지의 쪽빛이 나타났다. 물을 한번 들이느냐, 두세 번 들이느냐에 따라 빛깔이 달라졌다. 나는 오묘한 색의 조화와 그 변화에 흠뻑 빠져 들었다.

무궁무진한 천연염색

a 마침내 쪽물이 든 명주

마침내 쪽물이 든 명주 ⓒ 박도

과학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자연에 대한 향수가 짙어가나 보다. 최근 그런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다. 과학 문명이 아무리 좋은 화학 염료를 개발해도 자연의 염료에 미칠 수 없음을 사람들은 이제야 알게 됐다.

화학 염료는 수질을 오염시키고 인체에 피부염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빛깔이 천편일률적이고 그 깊이가 얕다. 이에 견주어 천연 염색은 그 재료가 무궁무진하다. 식물의 뿌리, 줄기, 잎, 꽃 등이나 벌레나 벌레집에서도 색소를 얻을 수 있고, 황토나 숯에서도 염료를 얻을 수 있다.

천연 염색은 인체에도 좋은 바, 특히 피부와 맞닿는 속옷은 천연 염색 옷감이 좋다. 피부에 부스럼이 생겼으면 화학 염료의 옷을 입으면 그 부스럼이 덧나기 쉬우나 천연 염료의 옷을 입으면 자연 치유가 된다.

현대는 개성의 시대요, 다양화 시대다. 천연 염색을 하는 이는 자기 취향에 따라 천연의 염료로 여러 빛깔을 연출할 수 있고, 오묘한 빛깔의 깊이를 마음껏 드러낼 수도 있다.

a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자료실에서 필자(도토리에다가 느릅나무 뿌리의 껍질로 염색한 넥타이 빛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자료실에서 필자(도토리에다가 느릅나무 뿌리의 껍질로 염색한 넥타이 빛깔) ⓒ 박도

필자가 지난 번 미국에 갔을 때 아내가 염색한 넥타이를 번갈아 맸는데 동포들, 특히 여성들이 넥타이 빛깔에 감탄하면서 어디서 산 것이냐고 많이 물었다.

생쪽 물들이기를 마친 아내는 염색한 명주 천을 그늘에서 말렸다. 그래야 물이 곱게 들고 날리지 않는다고 했다.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강원도에서도 쪽 재배가 가능하고 생쪽 물도 들일 수 있음을 확인한 아내는 매우 만족하는 눈치였다.

나는 지금 아내가 염색해 준 속옷을 입고, 황토로 염색한 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

요즘 들어 '참살이(웰빙)' 바람 탓인지 천연 염색을 배우는 이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과학 문명 만능에 빠지지 않고 자연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남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a 쪽을 짓이겨 고운 망에 담고 있다

쪽을 짓이겨 고운 망에 담고 있다 ⓒ 박도

a 쪽이 담긴 고운 망을 주물러 쪽물을 우려내고 있다

쪽이 담긴 고운 망을 주물러 쪽물을 우려내고 있다 ⓒ 박도

a 쪽물에 명주를 넣어 물을 들이고 있다

쪽물에 명주를 넣어 물을 들이고 있다 ⓒ 박도

a 물을 들이는 횟수와 시간에 따라 옷감의 색깔이 달라진다

물을 들이는 횟수와 시간에 따라 옷감의 색깔이 달라진다 ⓒ 박도

a 쪽물을 다 들인 명주는 맑은 물로 헹군다

쪽물을 다 들인 명주는 맑은 물로 헹군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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