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시계탑에서 만나다

<뉴질랜드 여행기 8> 셰익스피어의 도시, 스트랫포드

등록 2004.10.07 13:44수정 2004.10.0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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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랫포드는 타라나키산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도시다. 대부분의 여행 안내책자들은 인구 5천명이 조금 넘는 이 작은 도시를, 본격적인 타라나키산 등정을 위한 배후 기지이며 에그몬트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셰익스피어의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도시명을 붙였다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은 영국 중부의 워릭셔에 있는 스트랫포드어폰에이본이라는 마을인데, 그 마을의 이름을 따서 스트랫포드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트랫포드가 셰익스피어에 빚지고 있는 것은 단지 도시의 이름만이 아니다. 바둑판 모양으로 나 있는 스트랫포드의 거리를 조금만 걷다 보면, 표지판에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그리고 어떤 것은 매우 친숙하기까지 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된다.

a 스트랫포드 시내 중심가 지도. 브로드웨이의 가운데 T라고 표시된 것은 시계탑이다.

스트랫포드 시내 중심가 지도. 브로드웨이의 가운데 T라고 표시된 것은 시계탑이다. ⓒ taranakinz

햄릿, 로미오, 줄리엣, 티볼트, 리어, 리간, 코델리어, 미란다, 프로스페로, 에어리엘, 올란도, 포르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하나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죽느냐, 사느냐"로 고민한 햄릿과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비극적 사랑의 두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은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이러한 거리 이름들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스트랫포드의 거리 이름은 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3번 고속도로에 붙인 브로드웨이라는 도로 이름을 제외하고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27개 작품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서 붙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길에서는 만나지 못한다

그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타라나키산의 도우슨 폭포를 구경하고 나서 스트랫포드에 막 도착한 우리를 맞이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비극의 주인공 바로 햄릿이었다. 나는 차를 길 가에 세우고 햄릿을 카메라에 담았다.


a 스트랫포드의 모든 거리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붙였다.

스트랫포드의 모든 거리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붙였다. ⓒ 정철용

그 거리의 어느 집에선가, 셰익스피어의 그 음울하고 비극적인 작품 세계로부터 빠져 나온 햄릿이 실제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러나 이곳에 숨어 사는 햄릿은 독살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고민하고 숙부와 놀아난 어머니의 부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비운의 왕자가 더 이상 아닐 터이다.

그 길에서 마주친, 미소 띤 얼굴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넨 한 사내가 어쩌면 행복한 평민으로 변신한 햄릿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른 도로들을 향해 걸었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템페스트>의 미란다 스트리트가 나오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스트리트도 나왔다.


그렇다면 줄리엣과 만나는 도로들 중에 분명 로미오가 있을 터인데, 줄리엣 스트리트를 따라 한참을 걸어 내려가도 로미오 스트리트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여행정보센터에서 집어 온 시내 지도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도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로미오 스트리트는 줄리엣 스트리트와 한 블록 차이로 빗겨가고 있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난 두 청춘의 슬픈 사랑처럼 스트랫포드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빗겨가고 마는 것인가?

로미오와 줄리엣은 시계탑에서 마침내 만난다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여행정보센터에 들러 나오는 길에 마주친 높은 시계탑에서 우리는 죽음이 갈라놓은 두 청춘이 다시 부활하여 만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스트랫포드의 명물로 손꼽히는 이 시계탑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하루에 세 차례씩 특별한 공연을 보여 준다. 오전 10시, 오후 1시 및 오후 3시에 시작되어 약 5분 동안 계속되는 이 특별한 공연의 주인공들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

실제 사람 크기만한 로미오와 줄리엣 인형은 시간이 되면 벽처럼 보이는 문을 열고 나와서, 차임벨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나오는 대사의 일부를 서로 주고받는다.

각각 다른 위치에서 두 번에 걸쳐 나타나지만 함께 만나지 못하고 엇갈리기만 하던 두 사람은 마지막 세번째에는 시계탑의 아래쪽 테라스에 함께 나타난다. 로미오의 손에는 붉은 장미꽃이 들려있고 그들은 이제 서로를 마주보며 마침내 이루게 된 자신들의 사랑을 기뻐한다.

a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번째 등장. 다른 위치에서 나타난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번째 등장. 다른 위치에서 나타난 그들은 만나지 못한다. ⓒ 정철용

a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번째 등장. 거리가 더 벌어져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번째 등장. 거리가 더 벌어져 있다. ⓒ 정철용

a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 번째에 가서야 드디어 만난다. 로미오의 손에 든 장미가 붉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 번째에 가서야 드디어 만난다. 로미오의 손에 든 장미가 붉다. ⓒ 정철용

이 유쾌한 5분짜리 단막극을 위해서 스트랫포드의 시계탑은 세 명의 줄리엣과 세 명의 로미오 인형들을 그 안에 품고 있다. 그 여섯 명의 인형 배우들은 그날 오전 우리가 다녀왔던 타피티 박물관의 관장인 나이젤 오글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10여명의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3시 공연을 구경했다. 시계탑이 건너다 보이는 길가에서 의자도 없이 서서 관람하는 것이었고 공연 중에도 차들이 도로를 씽씽 달리고 있어서, 음악 소리와 대사가 명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길에서는 만나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계탑에서 부활하여 마침내 만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유쾌하고 조금은 가슴 찡한 것이기도 했다. 일년에 한 번, 칠석날에야 겨우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우리의 견우와 직녀에 비하면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셰익스피어의 도시 스트랫포드에서는 이렇게 길에서는 만나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계탑에서 하루에 세 번씩 만나고 있었다. 치열하고 뜨겁고 진정어린 사랑은 이렇게 마침내 만나는 법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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