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엄정행, 고향나들이가 잦아진 까닭

"고향에서 마지막 꿈 펼치고파"

등록 2004.10.08 10:55수정 2004.10.0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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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 테너 엄정행

오늘을 사는 한국인 치고 ‘엄정행’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리고 우리 음악계의 걸출한 인물인 이 이가 경남 양산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양산시민이 있을까?


아마도 현존하는 성악가 가운데 엄정행 만큼 대중적 인기와 사랑을 받고 있는 이도 흔치 않을 것이다.

현재 경희대 음대 성악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엄정행은 1943년 2월 양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동래고) 진학을 위해 부산으로 나가기 전까지 줄곧 고향 양산에서 자라 온 양산 사람. 그래서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양산에는 친구들과 지인들이 많다.

a 엄정행학생성악콩쿠르가 열리고 있는 자투리 시간에 엄정행 교수(오른쪽)와 잠시 자리를 같이 했다.

엄정행학생성악콩쿠르가 열리고 있는 자투리 시간에 엄정행 교수(오른쪽)와 잠시 자리를 같이 했다. ⓒ 전영준

그런 엄정행이 고향 양산을 찾았다. '제18회 삽량문화제' 기간에 열린 ‘제2회 엄정행 전국학생성악콩쿠르’를 참관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지난 6월 24일 열린 양산시립예술단 창단연주회에 다녀간 뒤 3개월이 조금 지나 또 다시 고향 땅을 밟은 것.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양산 사람 엄정행 교수의 고향나들이가 부쩍 잦아졌다. 지난해 6월의 ‘제1회 엄정행 전국학생성악콩쿠르’와, 12월에 있었던 ‘양산문화예술회관 개관1주년 기념연주회’에 이어 올해 들어서도 두 차례나 고향을 찾은 것.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랄까. 이미 인생 60 고개를 넘어선 엄 교수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만큼 애틋해졌나 보다.

학생성악콩쿠르가 열리고 있는 10월 2일 오후 자투리 시간에 엄 교수와 자리를 함께 했다.


“내가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선친께서 음악교사였으니 내게 음악은 생활 그 자체였죠.”

어렸을 때의 꿈은 운동선수


엄 교수 아버지는 당시 꽤 이름이 알려져 있던 향토 음악가 엄영섭 선생. 양산의 중·고교뿐 아니라 경남 일원 교단에서 음악을 지도하기도 하고 양산교육청과 창원교육청 교육장으로 봉직한, 유능한 음악가이자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그는 음악적 유전인자를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맑고 곱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곧잘 노래를 불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육자인 아버지가 보여주는 모범을 통해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할 삶의 바른 자세와 인생의 참된 가치에 대해서도 일찍 눈을 떴다.

이는 어린 '정행'이 자라 나중에 음악가와 교육자라는 두 분야에서 모두 큰 업적을 이루는 데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었음직하다.

아무튼 성악가에게는 좋은 악기나 다름없는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으니 소년 엄정행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성악가가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

그러나 어린 시절 그의 꿈은 다른 데 있었다.

“운동선수가 되려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군민체육대회에 나가 기량을 뽐냈고 고등학교 때는 배구선수로 뛰기도 했죠.”

실제로 부산 동래고(37회)를 졸업한 그가 대학 진학을 위해 처음 원서를 내려했던 곳은 경희대 체육과. 그런데 뜻밖의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신장 173㎝의 배구선수는 받을 수 없다고 입학원서 창구직원이 숫제 입학원서접수조차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음악이었다. 운동 말고 잘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그 길로 같은 대학 음악과로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합격은 했지만, 목소리만 좋으면 음악을 할 수 있다는 무식한 생각으로 시작한 대학생활 4년은 참으로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아버지가 음악교사였어도 발성법을 배워본 적도 없고, 악보를 보는 법도 몰라 학교 생활이 지옥과 같았어요. 아마 음악이 그토록 힘든 것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음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학교생활이 답답하기만 했던 그로서는 음악공부는 뒷전이고 그럴수록 자꾸 배구에 대한 미련만 커져 갔다. 따라서 음악학도 엄정행은 음악실보다는 배구부 연습장을 기웃거리거나 하루 종일 영화관에 쳐 박혀 시간을 때우면서 사실상 학교를 그만둔 것이나 다름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어렵사리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에 올라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당시 이탈리아 연수를 마치고 막 귀국한 음악과 홍진표 교수의 호출을 받았다.

“음정 박자도 맞추지 못한다고 망신당하는 줄 알았죠. 그런데 뜻밖에도 칭찬을 하시더군요. ‘넌 목소리가 아주 좋아. 노력만 하면 최고가 될 거야. 열심히 해봐’라고요.”

한국적 정서를 가장 잘 빚어내는 국내파 성악가

엄정행 교수 약력

엄정행 교수는 경희대학교 음악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천예술제 성악부 특상, 제15회 조선일보 신인음악회 출연, 독창회 50여회 개최, <토스카> <나비부인> <춘희> 등 수십 편의 오페라 주역으로 출연했다.

여러 음반을 출반했으며, 미국 13개주,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초청 독창회 및 연주회를 가졌다.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날부터 엄정행의 학교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모든 학생들이 사사하고 싶어하던 홍 교수에게 개인지도를 받게 되면서 차츰 음악의 참맛을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날로 음악공부에 정진해 제15회 조선일보 신인음악회 출연도 하고 개천예술제 성악부 특상, 전국 대학생 콩쿠르에서 1등상 등을 수상해 주위의 촉망을 받기 시작한다.

홍 교수에게는 대학졸업 후 대학원 2년간, 또 대학원 졸업 후 2년간 줄곧 지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거치고 지금껏 모교에 남아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엄 교수는 외국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서 나름대로 음악적 입지를 이룬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내로라 하는 인사들 중, 외국물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음악가에게 있어 외국유학은 통과의례나 다름없는 점에 비쳐 볼 때, 국내파 엄정행의 성공은 그다지 흔치 않은 케이스다.

그랬기에 그는 한국 가곡을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소화하는 테너가수라는 평판을 듣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움과 슬픔이 사무치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노래로 빚어내고 한스러움마저 멋으로 승화시키는 데는 엄정행만한 성악가가 없다는 것이 우리 음악계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a 삽량문화제 '열린음악회'무대에 선 엄정행

삽량문화제 '열린음악회'무대에 선 엄정행 ⓒ 전영준

테너 엄정행 교수가 처음으로 우리 가곡만을 모아 음반으로 내었을 땐 소리 없는 오빠부대가 탄생했을 정도로, 그는 대중가요 가수 못지 않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음악가다.

그러기에 <월간조선>이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도움을 받아 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와 성악가 1백명을 선정, 1999년 12월 말부터 벌인 설문조사(<월간조선> 2000년 3월호에 게재)에서 엄정행 교수가 25명의 추천을 받아, 오현명씨에 이어 2위에 올랐던 것도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10월 2일 저녁, 고향의 전통적인 향토문화축전인 '제18회 삽량문화제'의 한 순서로 마련된 '열린음악회' 무대에 선 양산사람 엄정행을 고향사람들은 한마음으로 반기며 열광했다. 이렇듯 양산사람들에게 엄정행은 기쁨이요, 자랑이다.

서양 음악을 하더라도 우리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엄 교수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왠지 자꾸만 고향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앞으로 고향 양산에 내려와 예술고등학교를 세워 후학들을 가르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음악이 우리네 삶을 순화시키고 생각을 변화시켜 준다고 믿고 있는 양산사람 엄정행. 고향에서 이루고자 하는 그 꿈이 실현되면 양산으로서도 그만큼 복된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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