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긴 여정에 참여한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에게 과거청산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제다. 과거청산, 즉 과거 독재체제 하에서 저질러진 국가폭력,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와 그 책임자 처벌은 적어도 민주화의 1단계인 ‘이행’(transition)에 성공했을 때만이 가능하다.
또한 ‘이행’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과거 권위주의세력과 과거청산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보수세력에 비해 과거청산 지지세력의 힘이 약할 경우 과거청산은 그 시도조차 불가능하다. 따라서 과거청산의 정도는 민주화 이후 사회세력간의 힘의 관계를 반영한다.
보수우익세력의 반발로 무산된 필리핀 과거청산
아시아에서 민주화의 긴 여정을 가장 먼저 시작했던 나라는 필리핀이다. 마르코스 정권에 의한 인권유린과 1986년 2월의 ‘피플파워’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 군사독재시기만 해도 바다 건너 필리핀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반독재투쟁은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때문에 마르코스 독재를 무너뜨렸던 ‘피플파워’의 여파는 당시 군사통치 끝자락에 있던 한국 민주화세력들을 더욱 고무시켰다. 그만큼 필리핀의 민주화 이행은 아시아에서 선진적이었다.
민주화 이행 이후 필리핀에서 과거청산 문제가 중요한 사회의제로 부상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르코스 독재가 종식되었지만 그 동안 있었던 국가폭력에 대해 집단적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우선 아키노정부는 마르코스가(家)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회전반의 부패를 혁신하기 위해 대통령직속의 ‘좋은정부위원회’를 설치하고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 가족들과 인권단체들의 과거청산 요구도 강력했다. 이를 배경으로 아키노 대통령은 취임 3일만에 인권 및 정치권에 관한 국제협약(ICCPR)을 비준했고,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억압적인 법령들을 일부 폐지했으며, 대통령 직속으로 ‘정치범위원회’와 ‘인권위원회’(PCHR)를 설치했다. 희생자 가족들과 인권단체들도 인권위원회의 과거청산 의지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인권위원회의 과거청산 시도는 군 출신의 국방장관과 군총사령관으로부의 반감을 샀다. ‘좋은정부위원회’도 대통령의 친인척 등용 문제, 지방의 도박조직, 군부와의 유착 문제 등으로 인해 도덕성에 타격을 받고 활력을 잃은 터였다. 군부는 군과 군의 지원을 받던 무장조직의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인권위원회의 조사가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여전히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게릴라들에 대한 진압작전만을 방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군부는 인권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인권단체 출신 활동가들이 공산반군의 협력자들이라고 비난해댔다.
결국 아키노 정부내 보수우익들의 반발로 인권위원회 예산집행이 연기되고 인권단체들로부터 신망을 받던 인권변호사 출신 인권위원회 위원장까지 사망하면서 인권위원회는 1년 만에 해산됐다. 과거청산 시도가 군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정부내 보수우익의 반발로 무산된 것이다.
물론 아키노에 이어 취임한 라모스 정권하에서 독재시기에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데 악용되었던 국가전복방지법은 폐지됐지만 이를 대체한 형법하에서 비사법적 처형을 포함하는 인권유린이 계속됐다.
민주화 이행의 전화점이 된 타이의 1992년 5월 반군부 민주항쟁
필리핀의 뒤를 이어 민주화 이행을 경험했지만 과거청산 시도조차 되지 않은 나라가 타이다. 타이의 경우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등 대대적인 인권유린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는 1976년 10월과 1992년 5월이다.
1976년 10월 6일 타이어로는 ‘혹 뚤라’로 불리는 이 날, 군과 경찰, 우익폭력조직들은 왕실과 국가를 전복하려는 불순세력들을 소탕한다는 명분하에 국립 탐마삿대학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학생들을 향해 총기를 발사하고 피신하는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이때 약 1300명이 죽고 그 이상의 숫자가 부상을 당했다. 그로부터 약 16년 뒤인 1992년 5월 반군부 민주항쟁 와중에서는 민간인 50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고 실종됐다.
그렇지만 1992년 5월은 민주화 이행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때를 계기로 과거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유린의 진상을 밝혀야 된다는 목소리가 인권단체, 지식인사회로부터 제기됐다.
이러한 배경아래서 민간인 주도로 ‘타이 1992년 사태 진상과 정의위원회’와 ‘1976년 10월 6일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어느 한 경우도 국가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진상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1976년 10월 6일에 자행된 국가폭력은 그 잔인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진보적 인사들조차 그동안 10월 6일 대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10월 6일의 국가폭력이 적지 않은 학생운동, 사회운동 지도자들이 인도차이나 사회주의혁명에 고무 받아 이른바 ‘좌경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시점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10월 6일 대학살 사건 이후 산으로 들어가 공산 게릴라들과 합류하였던 학생운동, 사회운동 지도자들은 중소분쟁의 여파로 베트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모두 버림을 받게 되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환멸에 빠져 ‘투항’하고 말았다. 때문에 10월 6일은 그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상처’(trauma)로 남아 있다.
최근 민간주도로 조직된 ‘1976년 10월 6일 진상조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일부 지식인들은 10월 6일 대학살을 당시 사회주의운동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던 기득권세력이 개입된 ‘국가범죄’로 규정했다. 이러한 해석은 10월 6일 사태와 당시의 사회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주저하게 했던 그동안의 ‘정신적 상처’로부터 벗어나려는 진보세력의 새로운 시도로 평가된다.
과거청산은 ‘완료형’ 아닌 ‘진행형’
이렇듯 아시아에서 비교적 민주화 이행을 먼저 경험한 필리핀, 타이의 예가 보여주듯이 민주화 그 자체가 과거청산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필리핀, 타이의 뒤를 이어 1998년 5월 뒤늦게 민주화 대열에 참여한 인도네시아에서 과거청산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과거청산은 커녕 아체 등지에서 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32년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민간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과거 국가폭력의 책임자인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과거청산을 둘러싼 한국의 상황 역시 현상유지를 원하는 보수와 현상타파를 원하는 진보간의 격돌에서 야기되는 ‘소용돌이’(vortex)의 연속 그 자체다. 이렇듯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순탄하지 않은 과거청산의 여정은 한국의 민주화 역시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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