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늘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펼치고자 했다. 그들이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 유학(儒學), 즉 성리학(性理學)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생활인으로서 그들의 삶의 자세는 도덕성을 중시하였고, 수양의 덕목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그들에게 있어 '수기(修己)'란 도덕적인 완성을 추구하기 위한 정신 수양의 자세를 가리킨다.
중세의 지식인들은 학문을 하는 행위를 곧 자신의 인격 수양 과정과 동일시했다. 때문에 옛 성현들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논어(論語)>.<맹자(孟子)> 등 유가(儒家) 경전(經典)의 습득은 학문에 있어서의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들은 개인의 도덕적 수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비로소 벼슬에 나아가 다른 사람을 교화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도덕적인 자기 수양을 닦은 후에 관직에 나아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치인(治人)'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관리로서 남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치자(治者)의 도덕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높은 벼슬을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능력과 학식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인격적인 면에서 도덕적 결함이 있으면 심지어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요행히 당대에 그러한 비난을 견디며 벼슬을 지킬 수도 있었지만, 후세의 냉철한 역사적인 평가를 통해서 단죄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했지만, 그 중에서도 과거(科擧)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길이었다.
과거란 유학(儒學)을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던 나라에서, 주로 유교 경전의 시험을 통해 필요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과거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고, 각 개인의 일생을 던질 정도로 막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중세의 지식인들에게 과거를 준비하는 과정은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쌓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개인의 인격 수양을 닦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당시의 지식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체득한 자신의 식견을 바탕으로 언제든지 현실 정치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은 평소에 연마한 학식을 바탕으로 언제든지 현실 정치에 참여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예비 관리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과거란 선발과정을 통과하여야만 관리로서의 공적인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과거를 치른 사람이라면, 어떤 측면에서든 국가를 경영할만한 생각과 자세를 지니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하지만 관직의 등용문으로서 오랜 기간동안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과거에 사용되던 문체는 일정한 격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에 따라서는 그러한 과거의 문체가 순수한 학문에는 해가 된다고 주장하여 과문(科文)의 폐단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도 하였다.
일정한 틀에 맞는 과거의 문체를 익히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고, 이 결과 각 개인의 개성이 과문을 통해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첫 관문인 과거에 응시해야만 했기에 과거의 문체는 당시 사람들에게 쉽사리 무시될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논할 <책문(策文)>은 조선시대 시행된 과거 문체의 하나이다.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이 고급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대과(大科)를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대과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거쳐서 수많은 응시자들 중에서 33명이 선발되었고, 이들이 임금 앞에서 치르는 최종시험인 전시(殿試)의 시험 과목 중 하나가 바로 책문이다.
흔히 '대책(對策)'이라고도 하는데, 시험에서 제출된 문제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대책과 정략'을 진술하는 글이다. 따라서 그 시험 문제는 임금이나 임금을 대리한 관리가 내리고, 응시자는 그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형식으로 쓰게 된다. 임금이 내린 시험 문제가 '책문(策文)'이며, 과거 급제자들이 이에 답한 것이 바로'대책(對策)'이다.
김태완의 <책문>은 조선 시대 임금이 내린 책문과 과거에 응시했던 인재들의 대책을 뽑아 엮은 책이다. 나는 과거 응시자들의 '대책'의 내용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보다 여러 임금들이 문제로 제출했던 '책문'의 내용에 더 흥미를 느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선발된 인재들이라면 마땅히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고 통치자였던 임금이 힘든 과정을 통과하여 발탁된 인재들에게 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대 현실 정치에서 시행하고자 했던 갖가지 정책이나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제들이 다수 출제되었을 것임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임금으로서는 아직 현실 정치의 때가 묻지 않은 젊은 인재들에게 그만큼 이상적이고 개혁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기에 임금이 시험 문제로 내린 책문은 그만큼 당대의 현실 정치에서 긴요하게 여겨지는 주제였을 것이다. 때로는 통치에 필요한 장기적인 안목을 요구하는 문제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임금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통치의 철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정치 현실에서 눈앞에 닥친 각종 현안에 대해서 젊은 지식인들에게 진솔한 의견을 구하고자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임금의 처지에서 본다면, 자신에게 필요한 정책이나 철학적인 문제를 당대의 인재들에게 묻고 그 답을 얻고 싶은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그렇기에 임금이 내린 책문의 주제를 통해서 당대 왕들이 통치에 임하는 자세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이 책에 수록된 책문의 주제들은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었을 것이라고 파악된다.
이와 함께 책문에 자신의 포부와 전망을 담아 응답을 한 인재들의 대책도 주목할 만하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과거의 문체는 반드시 필요한 격식을 갖춰야만 한다. 주어진 주제에 대해서 무작정 자신의 생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책문의 형식에 맞추어 일정한 시간 동안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펼쳐 보여야 한다.
또 답안에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전고(典故)를 제시해야만 하고, 자신이 그동안 읽었던 유학 경전을 비롯한 수많은 책들을 그 속에 적절히 용해시켜야만 한다.
오늘날 과문(科文)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문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해득하기 쉽지 않고 난해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기인한다. 형식적으로는 단순히 하나의 어구(語句)에 불과한 전고가 때로는 매우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전고가 어떠한 배경에서 쓰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해당 글을 제대로 읽어내는 요체가 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독자들이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책문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 김태완 덕택이다. 이 책에서는 치밀한 조사를 통해 각종 전고에 대해서 유익한 자료를 제시하고, 문맥에 맞도록 적절한 번역을 시도하고 있다.
실제 책문의 어떤 내용은 저자가 제시한 주석을 참고하지 않으면, 번역문 자체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수많은 저서를 뒤져 힘들여 찾아 제시한 주석들은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에 의해서, 수많은 전고 속에 갇힌 난삽하기 그지없는 문장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쉽게 읽힐 수 있는 새로운 '글'로 재탄생된 것이다. 그만큼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면모이기도 하다.
그런데 <책문>의 내용은 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 저자의 후기(後記)에 의하면 처음에는 책문 30여 편을 수록할 계획이었는데 검토 과정에서 그 중 '가장 흥미있고 현실감이 드는' 글들만을 다시 추린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애초에 '정치이념','정치개혁' 등 16개 항목으로 나누어 묶었던 글들이 검토 과정에서 상당수 실리지 못해, 이 책의 목차만으로는 어떤 기준과 편제에 따라 배열한 것인지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책의 내용을 읽다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또한 저자의 후기에도 그러한 과정을 밝혀 놓았지만 독자인 나로서는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제목을 통해서 각 책문의 성격이 어느 정도 드러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수록 순서와 편제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부족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차라리 애초의 편제를 적절히 살리지 못했다면, 시대 순으로 배열하여 책문의 주제에 따른 역사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앞에서 논한 이 책의 장점에 의해 충분히 가려질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 독자들에게 생소한 글인 '책문'을 상세하게 소개하고자, 앞부분에 '책문을 읽기 위해'라는 항목을 설정하였다.
'책문, 왕과 세상을 향한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과거제도와 과거의 형식들, 그리고 책문이 지닌 성격과 의의 등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저자는 그리하여 책문을 '한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지금까지 갈고 닦은 실력과 꿈과 야망을 펼치기 위해, 이제 막 첫발을 내딛는 한 젊은이의 청사진'으로 규정하였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책문과 대책을 수록한 본문은 전체 1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책문 13편과 이에 응답한 대책 15편을 수록하고 있다.
수록된 발문은 대체로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부터 15대 광해군까지 아우르고 있다. 각 장은 임금이 내린 문제인 '책문'과 이에 대하여 답안을 제출한 과거 응시자들의 '대책'을 번역하여 수록하고, 여기에 저자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기 쉽게 정리한 해설인 '책문 속으로'라는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책문'과 '대책' 속에 등장하는 용어와 내용에 대해서는, 문장 속에 등장하는 각종 전고(典故)의 원전을 밝힌 '출전주'와 해당 내용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 '역주'를 별도로 설정하여 책의 말미에 첨부했다.
특히 저자의 설명으로 구성된 '책문 속으로'은 상세한 설명으로 시대 상황을 간략하게 짚어주고 있어 독자들이 당대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
본문 뒷부분에는 '조선의 책문, 지식인들의 이론적 통로'라는 제목의 저자 후기를 수록하였다. 이밖에도 여러 책문들이 수록되었던 '출전 문집'과, 유학의 경전인 사서(四書)를 비롯한 '인용 문헌'에 대해서도 간략한 해제를 달아서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이처럼 단순히 원전을 번역하여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책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안목이 독자들에게 이 책의 내용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를 배우는 자세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역사는 늘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봐야만 한다. 현재적 관점이 사라질 때,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록물로서 화석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료를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다루느냐는 결국 그것을 해석하는 연구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책문, 이 시대가 묻는다
김태완 지음,
현자의마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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