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34회

등록 2004.10.13 07:49수정 2004.10.1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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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오후에 출발하려던 일행은 언수화의 죽음으로 인해 변경될 수 밖에 없었다. 수화가 타살되었다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들이 외부인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일행이 고집스럽게 출발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이 일행의 소림행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서가화나 송하령이 시간을 정해 약속한 것은 아니라는 말에 그들은 이번 사건이 해결된 후에 떠나기로 한 것이다. 전연부와 갈유는 점심을 들자마자 손가장 내의 남자란 남자는 모두 조사하기 시작했다.


주로 어제 저녁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혼자 있었다면 누가 그 사실을 입증해 줄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고 있었다. 그 나머지 일행은 할 일이 없었다.

할일 없는 일행은 두 사람이 더 늘어났다. 오후가 되면서 손님 두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손가장에는 시도 때도 없이 손님이 든다. 하지만 이번 손님 두 사람은 어제 온 일행만큼이나 귀한 손님들이었다.

바로 소림사의 광무선사(廣武禪師)와 혜각대사(慧覺大師)였다. 광무선사는 현 소림사 방장(方丈)인 광허선사(廣虛禪師)의 사제로 특별한 위치에 있는 신승이었다. 법명(法名)에 무(武)가 들어간 승려는 대개 뛰어난 무승(武僧)이 많다.

그것은 무공에 대한 자질을 소림사 내에서도 인정했다는 의미가 된다. 특히 광무대사는 독특한 무승이었다. 그는 많은 소림사 승려들이 어려워 익히기를 싫어하는 소림비기(少林秘技)를 유독 익히기 시작했다.

사부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의 재질을 알아 본 사형인 현 장문인이 달마원(達磨院)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달마원은 소림의 무공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목적을 가진 곳으로 이름난 무승의 대부분은 모두 달마원 출신이다. 또한 무림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소림 내에서도 뛰어난 무승들로 구성된다는 소림십팔나한(少林十八羅漢)이 바로 달마원 소속이다.


그 달마원의 현 원주(院主)가 바로 광무선사였다. 또한 광무선사보다 한 배분이 낮은 혜각대사는 소림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지객당(知客堂)의 당주(堂主)로 현 장문인의 고제자이며 차기 방장(方丈)으로 거론되는 고승이다.

소림의 거물들이 손가장을 방문한 것이다.


“오랜만이외다. 손장주.”

광무선사의 인사에 손불이는 목을 움츠리면서 합장을 했다.

“어서오십시오. 선사. 정말 반갑소이다.”

광무선사는 이상하게 주눅 들게 만든다. 나이가 고령임에도 기이하게도 그의 눈썹이나 수염은 아직 반백(半白)이다. 더구나 부리부리한 두 눈은 사찰 입구를 지키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의 그 모습이다.

그러니 왠만한 사람은 슬슬 피하는게 상책이다. 그에 비해 혜각대사는 사십대의 온화한 얼굴이고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얼굴이다.

“아미타불…. 그간 무량하셨습니까?”

예의도 깍듯하다. 지객당을 맡아 아무 탈없이 벌써 칠년째다. 그의 원만한 성품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서 오시오. 대사....! 삼년 전에 뵙고 찾아가 보지 못했는데 여전하시오.”
“사숙께서 계신데 별 말씀을….”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어른을 모시고 나온 혜각에게 그런 인사는 부담이 된다.

“헌데 어인 일로 이 먼 걸음을….”

광무선사와 혜각대사의 비중은 소림 내에서 그리 작은 것이 아니다. 아니 전 무림을 비추어 보아도 비중이 낮을리 없다. 이런 정도의 거물이 둘씩이나 동행해서 무림에 나왔다는 사실은 무림의 이목이 집중되고도 남는다.

“개방(丐傍)의 철골개(鐵骨丐)께서 편찮으시다는 전갈을 받고 다녀오는 길입니다.”

개방의 본타는 하북성(河北省)에 있다. 개방의 경우 타 문파와는 달리 본타가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방방주가 머무는 분타가 본타 역할을 하는 것이 개방의 특징이다. 따라서 개방방주의 움직임은 비밀스러워 타 문파에서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런 개방의 현임 방주가 편찮다니 기이한 일이다. 손불이가 듣기로 철골개는 아직 육순이 넘지 않았다. 그런 철골개를 위해 혜각대사가 나선 것은 이해가 되지만 광무선사까지 나선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을 입장도 아니다.

“좀 쉬었다 가도 되겠소이까?”

광무선사의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어이쿠....제가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다보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두분이시라면 제가 오히려 일년 내내 모시고 싶은 분들이지요.”

그는 직접 두 사람의 앞장을 서며 정고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무당에서 어제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는 인물과 그의 사제들이 방문해 있는데 소림에서 오늘 이런 거물들이 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우연이었다.

“집안에 안좋은 일이라니요.”

뒤 따르던 혜각이 묻자 손불이는 잘되었다는 듯 대답했다.

“제 첩실 중 한사람이 자기 방안에서 살해되었다오. 이거 참...”

상(喪)이 났는데도 손님을 맞아 들이는 것을 보면 손불이는 역시 손불이다.

“아미타불.......! 어찌 그런 일이...”
“아무래도 제 집에 마(魔)가 낀 모양이오. 마침 오셨으니 잘 되었소. 대사께서 경(經)을 좀 외어 이 마(魔)를 거두어 주시오.”

소림에서 최고의 배분인 광무선사는 허허롭게 웃었다. 그렇게 해서 천하에 다시 없을 무승 광무선사와 혜각대사는 졸지에 마를 쫒아내고, 사(邪)를 없애며,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는 경문(經文)을 오후 내내 외어야 했다. 그 점 말고는 그저 정고헌에 배정받은 객실에서 먹고 자는 일밖에 없는 다른 일행과 다를 바 없었다.

× × ×


갈인규는 경여의 방을 나와 잠시 갈유에게 갔다가 담천의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곧 바로 문을 열자마자 안의 모습에 다시 문을 닫았다. 담천의는 깨어 있었다. 상의를 벗은 상체에는 땀과 분비물로 홍건했지만 방바닥에서 한자 정도 허공에 떠서 가부좌를 튼 모습이었다.

담천의는 부드럽게 양팔을 허공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몸 전신에서 서기(瑞氣)가 비치는 듯 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갈인규는 알았다. 굳어있는 자신의 몸을 추스르고 치열하게 몸을 다듬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실례다. 아니 단지 실례가 아니라 무림에서는 금기(禁忌)로 여겨지는 행위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소리나지 않게 문을 닫은 것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어릴적부터 머물던 자신의 거처로 한번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담천의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몰랐다. 갈유가 준 탕약을 마시고 운기를 시작한 그는 세 번의 대주천(大周天) 끝에 삼년 동안 자신의 몸에 쌓여 있는 탁기를 모두 몰아낼 수 있었다.

그의 몸은 깨끗해 졌고,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송하령이 먹인 영약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가 느낄 수는 없어도 그의 몸은 이미 영약의 효능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주천을 끝낸 뒤에 왜 갑자기 사부 아닌 사부가 가르쳐 준 세 개의 무공 중 하필 태극산수(太極散手)가 떠올랐을까?

마치 박투술(搏鬪術)인 것 같기도 하고 심신(心神)을 강건하게 하는 도인술(導引術) 같기도 한 무공이었다. 타격이 목적인 장공(掌功)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베고 부수는 수공(手功)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잡고 채는가 하면 밀고 당기는 가운데 상대방의 힘까지 이용해 타격을 주고 부수어 버린다.

더구나 사부 아닌 사부가 이르길 태극산수를 극성까지 익히면 심안(心眼)이 뜨인다 했다. 심안이란 보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다. 심안이 뜨이면 허(虛)를 버리고 실(實)을 보게된다. 변(變)과 환(幻)을 파악하고 흐름을 알게 된다. 검에 매달려 있던 담천의에게 그는 태극산수부터 익히기를 권했었다.

상승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도(武道)의 본연을 이해하지 못하면 깨닫기 어렵다. 태극산수는 그런 점에서 무도의 본연을 가르치고,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일종의 지침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천장절벽을 마주보고 있는 듯 한치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헌데 지금 갑자기 태극산수란 그 비결이 머리에 떠오르고 그는 미친 듯이 그것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기이했다. 막혔던 벽이 갑자기 허물어지며 길이 보였다. 태극산수는 펼치면 펼칠수록 오묘했고, 그의 몸은 자연의 기운과 같이 숨쉬고 동화하는 듯했다. 그의 몸은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바람과 같이 흐르는 듯 했다.

이것은 다른 세계였다. 그가 고독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고련했던 그것과는 달리 대자연의 섭리(攝理)와 인간사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 속에서 피어나는 세계였다.

삼년간의 삶의 방치는 결코 허비해 버린 삼년이 아니었다. 인간사 속에서 자신은 배제된 채 뭇 군상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들으며 얻은 경험과 느낌은 결코 버려져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었다.

또한 송하령과 산을 내려오다 만난 그 무형의 기운은 그의 뇌리보다는 그의 몸에 먼저 각인되어 있었다. 무공이라고 할 수는 없되 결코 무공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정신력의 세계.

그의 몸이 청정해지자 그의 본능이 먼저 반응하였던 것이고, 그것으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두세단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렇듯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진전이 없다가 우연한 기회에 오는 것이다. 마치 커다란 독속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차지 않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다 차 오르면 물이 갑자기 넘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다.

삼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그 한계가 서서히 벗겨지고 있었다.

언수화(彦秀花)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출발을 지체하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담천의에게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몇 년을, 아니 평생을 허비했을지 모를 기회를 부여해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9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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