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순응주의 빠진 나약한 지식인의 말로

[특별기획-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20] 독립협회장 윤치호

등록 2004.10.17 21:31수정 2004.10.2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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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 1865∼1945년, 창씨명 伊東致昊)는 개화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조선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중국·미국에서 유학한, 당시로선 드문 식견가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조선(한국)의 잠재역량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데다 식민지라는 ‘상황논리’에 빠진 나머지 결국 일제와 타협하고 말았다. 그의 친일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해외유학 경험을 통한 자기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친일행적보다도 친일논리에 눈길이 쏠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 에모리대학 재학 당시의 윤치호
미국 에모리대학 재학 당시의 윤치호
윤치호는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 윤웅렬(尹雄烈. 1840∼1911년)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海平). 그의 부친은 무관이었지만 일찍 개화에 눈뜬 사람으로 그의 진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윤치호의 첫 유학지는 일본. 1881년 일본의 신문물 견학차 파견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도일(渡日)한 것이 계기였다.

그는 조사(朝士)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따라갔는데 당시 나이는 17세, 일행 62명 중 막내였다. 3개월간의 시찰을 마친 후 그는 귀국치 않고 유길준(兪吉濬) 등과 함께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이들이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된다. 그는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의 소개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명치유신기의 지식인 나카무라(中村敬宇)가 설립한 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그는 여기서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

‘대세 순응주의’에 빠진 개화기 지식인

이 시절 그는 김옥균(金玉均) 등 국내 개화파 인사는 물론 일본인 개화파인사, 재일 외국인 외교관들과도 교류를 쌓아가면서 국제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2년간의 일본생활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슬프다. 조선의 현상이여, 남의 노예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진작(振作)하려 하지 않는가.”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조국의 현실은 이러했다.

1883년 5월 그는 초대 주한 미국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主事)로 임용돼 통역과 공문서 번역 일을 보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그는 당시 개화파 인사들의 급진적 개혁론에는 찬동치 않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들과의 친분 때문에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후 정변 공모자로 몰려 상하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885년 상하이로 간 그는 현지 미국 총영사의 알선으로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앨런이 설립한 미션 스쿨로 그는 여기서 3년 반 동안 수학했다. 그러나 원치 않았던 상하이생활 초창기 그는 한동안 술과 여자로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일기(日記)>에 따르면 초기 2년간(1885년 2월∼1887년 2월) 음주 횟수 67회, 밤의 여성과 동침횟수는 11회. 망명객의 울분과 20대 초반의 객지생활의 외로움이 겹친 것이었으리라. 그의 방탕한 생활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막을 내렸다. 상하이에서 3년 반을 보낸 후 청국(淸國, 청나라) 사회에 대한 그의 소감은 ‘더러운 물로 가득 채워진 연못’이었다. 반면 일본은 ‘동양의 한 도원(桃園)’. 이 무렵 그의 대일관(對日觀)의 한 단면이다.


미국 유학은 그에게 또 하나의 자극이었다.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미국의 ‘위대함’을 목격하고는 미국은 일본보다도 한 수 위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로 깨지고 말았다.

그가 강대국 미국·러시아를 제치고 친일(親日)로 나선 데는 미국에서 경험한 인종적 편견이 작용한 면이 없지 않다. 러일전쟁 무렵 그는 ‘황인종 단합론’을 들고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대륙침략자들이 주창한 ‘아시아주의’ ‘동양평화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약자인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에 순종하는 길 뿐"

1976년 10월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윤치호의 동상
1976년 10월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윤치호의 동상
윤치호가 일제에 굴복, 친일로 나선 것은 ‘105인사건’(소위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사건’)이 계기다. 한일병합 2년 뒤인 1912년 일제는 식민통치의 걸림돌인 민족운동세력과 기독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

그는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 13일 친일전향을 조건으로 출감하였다. 출감 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일선동화(日鮮同化)’를 부르짖었다.

“…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민족의 동화(同化)에 대한 계획에는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볼 생각이다” (매일신보, 1915년 3월14일자)

그가 변절한 직접적인 요인은 가혹한 고문과 일제의 강요였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그의 오랜 사상적 기반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의 저자 유영렬(柳永烈. 숭실대·사학과)교수는 “개화기 이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충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변신한 윤치호의 친일행보를 따라가 보자. 1919년 ‘3·1만세의거’ 직전 그는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제의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의거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자)라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주장은 약자인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에 순종하는 길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당시 일제가 선전하던 ‘조선독립 불능론’ ‘투쟁무용론(無用論)’ 등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그의 친일논리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다.

1920년대 들어 그는 일제의 ‘문화정치’ 선전과 청년층의 반일동향을 억제하는데 이용된 교풍회(矯風會)의 회장을 맡는 등 각종 친일단체에서 일제의 식민정책 선전에 주력하였다. 당시 그는 민족개량·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는 일제통치를 수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타협적 민족운동이었다.

학병지원 마감 2일 전 윤치호의 '총출진하라!' 가 실린 1943년 11월 18일자 <매일신보> 1면. 윤치호는 학병권유에도 앞장섰다.
학병지원 마감 2일 전 윤치호의 '총출진하라!' 가 실린 1943년 11월 18일자 <매일신보> 1면. 윤치호는 학병권유에도 앞장섰다.

"조선의 살 길은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

한편 중일전쟁 발발(1937년 7월 7일)을 계기로 그의 친일은 강도를 더해갔다. 총독부 주최 시국강연반의 연사로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하는가 하면 이듬해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이는 ‘내선일체(內鮮一體)에 합당한 조치’라며 환영하였다. 또 그 해 7월 ‘황국신민화’의 실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상무이사로 선정돼 창립총회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했다.

1941년 ‘대동아전쟁’을 맞아서는 전시결전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가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서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징병제에 이어 1943년 학병동원이 시작되자 ‘조선학도들에게도 내지(內地, 일본)동포들과 어깨를 겨누어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영광스런 길이 열렸다’(매일신보, 1943년 11월 18일)며 학도들의 출진을 촉구하였다. 이 같은 공로로 45년 2월 그는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출돼 부친에 이어 2대에 걸쳐 ‘일본 귀족’ 반열에 올랐다.

“…(일제하) 조선인은 좋든지 싫든지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속국의 상태에서 그가 한 일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질 않습니다….”

사망(1945년 12월 16일) 2개월 전 그가 남긴 글의 한 구절이다. 지식인으로서의 ‘반성’은 차치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참회’ 한마디도 없다. 명색이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그가 해방 후 남긴 ‘자기고백’은 겨우 이런 모습이다. ‘일본의 스코틀랜드화(化)’가 조선이 살 길이라며 일제의 ‘우호적인 식민통치’를 기대했던 그의 나약한 역사관이 결국 그를 친일의 길로 안내하고 만 것이다.

'윤치호 일기' 어떤 내용 담았나

▲ <윤치호 일기> 번역본
<윤치호 일기(尹致昊 日記)>는 한말의 선각자 윤치호가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60여 년간에 걸쳐 기록한 개인적 메모. 초창기 일기는 한문·국문으로, 1889년 12월 이후분부터는 영문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청국·미국 등 해외 유학시기의 <일기>에는 당시 그 나라의 발전상과 시국상황, 그리고 그곳에 체류중이던 한국인들의 동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사료적 가치도 크다.

또 국내체류기인 1883∼1884년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이 목격한 갑신정변과 개화당의 활동이 소상히 기록돼 있으며, 특히 일제 강점기 그가 국내에서 활동할 당시의 <일기>에는 자신의 입장과 국내 지식인들의 동향 등도 담고 있다.

한말 시기부터 일제 말기까지를 기록한 이 <일기>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특히 윤치호 인물연구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개인의 ‘일기’ 치고는 방대한 분량도 놀랍지만 드물게 자신의 행적을 비교적 솔직하게 기록한 점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1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1883~1889년분이 한글로 번역돼 출간됐다. 또 2001년 2월 한 소장 역사학자 김상태씨가 1916~1943년분 영문일기를 모아 <윤치호 일기>를 역사비평사에서 펴낸 바 있다.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유영렬 지음,
경인문화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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