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교동을 배신하지 마라"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25)

등록 2004.10.25 07:25수정 2004.10.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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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부산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였습니다. 은빈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잔뜩 풀이 죽었습니다.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 놓고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울먹거리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우리집 정말 이사 가요?"
"그래."
"이사 안 가면 안돼요?"
"그래.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어 네가 많은 놀랬구나."
"오늘 학교에서 공부 마치고 운동장을 걸어 나오다 학교가 보고 싶어 뒤를 돌아다보았는데요. 눈물이 막 나왔어요. 학교가 쓸쓸하게 보였어요."

a 교동을 떠나는 뱃머리에서. 울어서 아내 눈이 퉁퉁 부었다.

교동을 떠나는 뱃머리에서. 울어서 아내 눈이 퉁퉁 부었다. ⓒ 박철

“우리 은빈이 마음이 많이 아픈 게로구나."
"선생님도 보고 싶고 친구들도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은빈아, 너는 교동을 떠나는 게 싫지? 우리 부산에 이사 가는 것 취소하고 계속 여기서 살까?"
"아빠, 저는요, 아빠를 믿어요. 교동을 떠나는 게 싫고 친구들이랑 선생님이랑 학교랑 헤어지는 게 싫지만 저는 아빠 엄마의 결정을 따르겠어요. 아빠 마음대로 하세요."

초등학교 2학년짜리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집 은빈이가 태어난 지 9개월 되었을 때 교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 동안 7년 6개월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어떤 때는 철부지 시골 아이지만, 어떤 때는 속 깊은 딸로 제법 말과 행동이 의젓하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요청에 따라 그런 결정을 했다고 쳐도 아이들에게는 큰 충격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섬을 떠나게 되었냐고 못내 아쉬워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도시에 가서 6개월도 안 되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어찌 그리 어리석은 결정을 했냐고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더 큰 바다를 보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고, 20년 농촌생활의 진솔한 삶의 경험을 도시에서도 잘 접목시켜 나가기를 바란다고 말씀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부산에 이사 온 지 꼭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이른 아침, 교회 옥상에 올라가 보니 부산항이 한눈에 보입니다. 컨테이너를 들어 올리는 육중한 크레인이 움직이는 모습도 보이고,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보입니다. 농촌과는 또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a 교회 사택 옥상에서 바라본 부산항 모습. 대형 크레인이 눈에 띤다.

교회 사택 옥상에서 바라본 부산항 모습. 대형 크레인이 눈에 띤다. ⓒ 박철

매우 분주한 모습이지만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무언가가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새로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20여년 전, 신혼여행 때 부산을 한번 스쳐지나간 것 외에는 한번도 살아 보지 못한 낯선 부산에서 새로운 사람 사는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갈 작정입니다.


걱정했던 은빈이는 아무 탈 없이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부산에 이사 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은빈이는 초보 부산 가시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수정1동 바로 집 근처에 위치한 동일초등학교에 전학을 시켰습니다. 토요일 날 수업을 마치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과 친구 집에서 실컷 놀다가 느지막이 집에 돌아와서는 대뜸 자기 오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빠야! 니는 밥 묵었나?"
"야, 너 부산에 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부산 사투리냐?"
"오빠야, 그만큼 나는 성격이 좋아서 잘 적응하는 거야."
"그건 성격이 좋은 게 아니고 나쁜 성격이야. 옛날 것을 그리워하고 오래 생각하는 것이 좋은 성격이지. 너는 교동을 배신하지 마라."
"나도 교동 생각을 좀 한다."

은빈이는 부산에 이사 오길 잘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친구들이 많아서 좋고, 아이들이 친절하게 잘 대해 주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은빈이가 책받침을 받치고 않고 연필을 꾹꾹 눌러 쓴 일기에 은빈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a 이제 우리 가족이 살게 될 교회의 모습.

이제 우리 가족이 살게 될 교회의 모습. ⓒ 박철

오늘 아침 동일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마음이 설렜다. 친구들이 잘 해 주어서 용기가 생겼다. 지금은 다른 아이들 못지않게 아주 친하다. 김지혜와 제일 친하다. 앞자리에 있는 선유선이 제일 잘 해 주어서 그 아이도 좋지만 우리 토끼조가 아니어서 잘 보지 못했다. 선유선이 뒤에 있는 애가 얘가 좋니 내가 좋니? 하고 물었는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 학교와 교동에 있는 지석초등학교의 공통점은 전교생이 38명 여기서는 한 반이 38명 우리학교 전교생 988명 모두 8자가 들어간다.
2004년 10월 20일(수요일) 날씨 아침에 비가 온 후 흐림.

오늘은 필리핀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딧줄 오빠 생일이다.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빠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차마 미안해서 못했다. 내가 예전에 오빠한테 했던 말 때문이다. 요즘 필리핀 날씨가 서늘하다고 하니까 내가 모은 용돈으로 점퍼와 편지를 써서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사랑해! 고마워! 생일 축하해! 나도 부산 학교에 얼마만큼은 적응했으니까 오빠도 적응 잘 하고. 알겠지? 오빠 공부 잘해. 아자! 파이팅!
2004년 10월 21일(목요일) 날씨 맑음

오늘 신아가 왔다. 귀여웠다. 신아 코를 비벼 주면 좋아한다. 태어난 지 3개월인데도 눈이 토끼 눈처럼 예쁘다. "이신아!"하고 크게 부르면 싫다고 고개를 흔든다. 생긋 방긋 웃으면 손으로 땅을 치고 발을 동동 굴린다. 류지음 언니가 발로 박수를 치면 얼굴을 손으로 가린다. 우유를 먹고 입술을 빨 때가 아주 귀엽다. "곰 세 마리"노래를 다솜이가 부르니까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다음에 또 놀러왔으면 좋겠다.
2004년 10월 24일(일요일) 날씨 맑음


우리 은빈이가 낯선 부산에 와서 빨리 적응하기 위하여 아이들과 친해져야 하고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벌써 부산 사투리가 술술 나오고 이곳 생활을 흡족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입니다.

a 부산에서 새로 사귄 은빈이 친구들.

부산에서 새로 사귄 은빈이 친구들. ⓒ 박철

아이들의 마음은 하얀 도화지와 같다고 합니다. 은빈이 마음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모르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과 동경이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사 오고 나서 짐 정리로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 저녁에는 가족들과 함께 광안대교의 아름다운 저녁 풍경을 보러 갈 계획입니다.

은빈이는 어제 너무 놀았던지 학교에 갈 시간인데 코를 박고 쿨쿨 자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아내가 은빈이를 깨우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부산의 새로운 생활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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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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