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대 비극의 현장 '아우슈비츠'에 가다

[여행기] 지난 여름 찾아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록 2004.10.25 23:02수정 2004.10.2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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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제2 수용소 수감자들이 사용하던 집단화장실
아우슈비츠 제2 수용소 수감자들이 사용하던 집단화장실강구섭
아우슈비츠 가는 길에 만난, 북한재건단에 참여한 할아버지

밤 9시 20분 베를린 출발, 다음날(9월 11일) 오전 8시 25분 폴란드 크라코프 중앙역 도착. 아우슈비츠는 크라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가량 더 들어가야 한다.


밤차로 11시간을 간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제대로 서 있을 자리도, 한 줄기 빛도 없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며칠을 실려가야 했던 희생자들을 떠올려 보며 차에 올랐다.

미리 예약한, 일반 좌석과 침대의 중간에 해당되는 '리게바겐'이라는 자리는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는 조금 넓은 좌석인가 했던 예상과 달리 간이침대와 비슷했고 가운데 좁은 통로를 두고 양쪽 벽에 세 칸씩 한 객실에 총 여섯 칸이 달려 있었다.

가운데 칸에 자리를 잡은 후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을 긁적이고 있는데 젊은 남자 둘이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아내와 내가 있는 객실로 들어왔다.

위칸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유럽여행을 하고 있는 미국인 대학생이었는데 한 사람은 할머니가 폴란드 출신이라고 했다. 이들은 런던에 내린 후 암스테르담, 파리를 거쳐 베를린에서 2차 대전 당시의 히틀러 벙커와 독일통일 관련 장소를 둘러본 후 밤차를 이용해 크라코프로 가는 길이었다.

좁은 객실에 적당히 서고 앉아 한국과 미국, 독일통일, 세계대전 등 그리 가볍지 않은 주제들에 대해, 그렇지만 그다지 무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후 두 친구는 독일 맥주는 미국 맥주보다 도수가 높아 적게 마셔도 취한다고 웃으며 맥주를 꺼내들고 복도로 나갔다.


한 시간 반쯤 지나 구 동독 코트부스역에 기차가 정차하면서 노부부가 객실 아래칸에 짐을 풀었다. 동독지역의 방언인지 노부부가 서로 주고받는 말이 좀 생소하다 싶었는데 이내 귀에 익은 독어가 들려왔다.

다시 출발한 기차가 반 시간도 채 못 가 다시 서더니 이번에는 한참 동안 정차했다.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서 검문을 하는 중이었다. 폴란드 경찰과 독일 경찰이 번갈아 여권을 훑어보고 지나간 후 노부부와 말문을 텄다.


라이프치히에서 오는 길이라는 이 노부부는 폴란드인 친구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에 가는 길이었다. 라이프치히를 출발해 코트부스에서 기차를 갈아탔던 것이다.

나와 아내가 한국 유학생이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어떤 한국인지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1954년 북한재건지원단으로 2년 동안 북한 함흥에서 머물렀다고 했다.

기차에서 만난, 1954년 북한의 함흥재건사업에 참여했던 헬무트씨
기차에서 만난, 1954년 북한의 함흥재건사업에 참여했던 헬무트씨강구섭
전직 모터 기술 마이스터(명장)였던 할아버지는 당시 150여명의 동독인으로 구성된 지원단의 일원으로 함흥의 주거단지 건설에 참여했고, 그때 평양, 문산 등을 놀러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독 시절의 일이었지만 북한 재건에 독일인이 참여했다는 것에 내가 적잖이 신기해하자 그는 베트남, 구 유고, 폴란드 등도 당시 참여했고, 폴란드는 함흥에 병원을 지었다고 했다. 그 때 나이가 24세였는데 벌써 50년이 흘렀고 3개월 후면 74세가 된다며 할아버지는 세월의 무상함을 되뇌었다.

그런 인연을 갖고 있어서인지 할아버지는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60세 무렵 통일을 경험했던 할아버지와 오늘날 독일 상황, 남북 통일 등에 대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아내와 내가 아우슈비츠에 가는 길이라고 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주 끔찍한 역사, 혼돈의 시간이었다는 말을 짧게 하고는 더 덧붙이지 않았다.

2차 대전 당시 10대 초반이었을 이 노부부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여전히 적지 않은 이곳의 분위기 속에서 이들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초면에 너무 많은 것을 물어보기 뭐해 금방 화제를 바꿨다.

하루저녁 이웃들과 대화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낯설음 때문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고 대신 오후에 읽었던, 어느 날 갑자기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엄마를 도중에 잃어버린 채 아빠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유대인 꼬마소녀의 이야기가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밤새 뒤척이는 사이 어느새 날이 밝았다. 아주 짧은 여행인데 기차길 밖 풍경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6시쯤 일어났다.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간간이 보이는 낡은 폴란드어 간판, 오래된 건물들, 허름한 시골 마을 등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 밖 풍경을 바라보며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만큼이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폴란드에 대해 괜히 공유의식이 느껴졌다.

내가 일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도 일어나셨다. 여행에서 경험한 것을 글로 옮길까 하는데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몇 가지 더 이야기하면서 라이프치히에 한번 놀러오라며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주셨다.

할아버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크라코프 역에 도착했다. 아우슈비츠 뿐 아니라 폴란드에서 가장 볼만한 여행지로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크라코프였음에도 역 앞 버스터미널은 시골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변변한 영어간판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를 찾아보고 왔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몇 번을 물은 끝에 환전을 하고 아우슈비츠행 미니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비극의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라는 생각 탓인지 버스 바깥 풍경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괜히 무척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류장에 멈춘 버스에 올라, 버스를 가득 메운 여행객들을 무덤덤하게 쳐다보는 현지인들을 이따금 보며 인류 최대 비극의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했다.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 입구. 입구 철제 위에 '노동은 자유를 준다'라는 독어문구가 써 있다.
아우슈비츠 제1 수용소 입구. 입구 철제 위에 '노동은 자유를 준다'라는 독어문구가 써 있다.강구섭

거대한 살인공장 아우슈비츠

거대한 살인공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몇 명이 이곳으로 끌려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희생당했는지 정확한 집계는 없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현지인 독어 가이드는 지금은 박물관이 된 수용소의 곳곳을 돌며 아우슈비츠의 역사, 이곳에서 비참하게 삶을 마쳐야 했던 희생자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희생자의 수를 말할 때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수용소를 두르고 고압전류가 흘렀던 철조망.
수용소를 두르고 고압전류가 흘렀던 철조망.강구섭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2차 대전 발발 후 1940년 4월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나치 친위대(Schutztaffel)와 독일 경찰국에서 최초, 건설했다. 그후 나치의 소련침공 이후 폴란드 인 뿐 아니라 소련군 전쟁포로 등도 수감되다가 1941년 여름,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이 진행되면서 아우슈비츠는 이를 위한 대량학살장소로 이용되었다.

1940년 수용소가 생긴 이후 1945년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략 150만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그 가운데 100만 가량이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유대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수감자의 사진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는 수감자의 사진강구섭
사진 아래 수감된 날짜와 사망 날짜가 적혀 있다. 사진의 수감자는 끌려온 다음날 목숨을 잃었다.
사진 아래 수감된 날짜와 사망 날짜가 적혀 있다. 사진의 수감자는 끌려온 다음날 목숨을 잃었다.강구섭
전시실의 벽에 길게 걸려 있는 수감자의 사진 밑에는 그들이 끌려온 날짜와 희생된 날짜가 적혀 있다. 어떤 사람은 끌려온 그 다음날 목숨을 잃기도 했고 거의 3년 가까이 생존했던 사람도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150만 희생자 가운데 90만 가량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20만명 가량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전염병, 영양 실조, 굶주림 등으로, 그 외 수십만이 잔인한 생체실험, 교수형, 총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가스실에서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나면 시신에서 금니, 머리카락 등을 수집했고 시체는 가스실 옆에 설치되어 있는 소각장에서 화장된 후 인근에 아무렇게나 뿌려졌다. 대량학살 후의 뒤처리는 물론 수감되어 있는 유대인의 몫이었다.

그렇게 수집된 머리카락은 수용소 인근 혹은 독일에 있던 섬유회사에 팔려 카펫 재료로 사용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머리카락에 함유된 성분을 분석한 결과 대량학살에 쓰여진 화학물질이 독일에서 만들어진 '사이클론B'라는 독가스로 밝혀졌다.

제 1 수용소 가스실 내부.
제 1 수용소 가스실 내부.강구섭
시체소각장 일부 모습. 하루 360여구의 시신이 처리되었으며 제 2 수용소에 대규모 가스실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나치 친위대의 벙커로 이용되었다.
시체소각장 일부 모습. 하루 360여구의 시신이 처리되었으며 제 2 수용소에 대규모 가스실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나치 친위대의 벙커로 이용되었다.강구섭
가스실 행을 모면한 사람들 또한 제대로 먹을 것도, 씻을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전염병, 기아 등으로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하루에 수십 명씩 죽어 가는 수감자들의 시체가 수용소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방치되고 그들에 대한 신원파악이 되지 않자 나치 친위대는 수감자의 몸(성인은 팔, 어린이는 허벅지)에 번호를 표시했다. 독일,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 있었던 40개 가량의 수용소 가운데 수감자의 몸에 직접 번호를 표시한 곳은 아우슈비츠가 유일하다.

아우슈비츠의 역사 속에도 우리의 일제 치하에서 있었던, 수감되어 있던 동족 유대인이 또 다른 유대인을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해야 했던 슬픈 일들이 빠지지 않는다.

수감되었던 유대인에 의해서 그려진 수감자들이 체벌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 오른쪽에 몽둥이를 든 사람이 유대인 관리인(블록 엘터스터). 그들은 나치 친위대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학대했다고 전해진다.
수감되었던 유대인에 의해서 그려진 수감자들이 체벌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 오른쪽에 몽둥이를 든 사람이 유대인 관리인(블록 엘터스터). 그들은 나치 친위대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학대했다고 전해진다.강구섭
수감자들의 작업상황, 생활 등을 관리하기 위해 젊고 건장한 유대인 수감자들 가운데 뽑힌 '블록엘터스터'라고 불리던 그들은 나치 친위대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학대했다고 전해진다.

한 블록엘터스터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유대인을 잔인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던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의 기억들을 2차 대전 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수감자에 대한 임시재판을 통해 사형집행이나 지하감방 수감이 이루어졌던 감옥 속의 감옥이라고 불린 11번 건물은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건물 입구 가장 왼쪽 방에서 임시재판을 통해 사형판결을 받은 수감자는 끝 방에 옷을 벗은 후 방에 바로 붙어 있는 문을 통해 총살의 벽으로 나가 총살을 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숫자가 적을 때는 탈의실에서 머리에 총을 쏴 죽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한 달에 수감자 약 4천여명을 학살했다.

수용소 내 감옥이었던 11번 건물의 지하 감방, 작은 철문(왼쪽)으로 기어 들어가 4명이 90 ×90cm의 좁은 공간(오른쪽)에 서 있어야 했다.
수용소 내 감옥이었던 11번 건물의 지하 감방, 작은 철문(왼쪽)으로 기어 들어가 4명이 90 ×90cm의 좁은 공간(오른쪽)에 서 있어야 했다.강구섭
지하실에 설치된, 한꺼번에 많은 수감자를 넣어 질식사시키기도 했던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 감방, 수감자를 아사시키는 감방, 4명을 한꺼번에 집어넣어 세워놓았던, 개구멍 만한 철문만 하나 달린 90 ×90cm 좁은 감방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도 사망자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관련자들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한다.

박물관 내에 희생자에 대한 정보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자료실이 존재하지만 오자마자 바로 가스실로 끌려가 20분만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도착하자마자 바로 학살당한 사람만 해도 7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작년에는 한 할머니와 가족이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은 생존자였던-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이곳을 다녀가기도 했다.

수용소를 둘러싼 이중 철조망과 좀 차가운 분위기의 건물색을 제외하면 널찍한 공간에 질서정연하게 나무가 심겨져 있는 수용소 전체 풍경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함께 설명을 듣던 누군가 그런 말을 꺼내자 가이드는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생존자들 또한 이곳을 다시 방문해 '그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이곳이 참 잘 지어져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고 전했다.

늘어나는 수감자를 더 조직적으로 관리, 학살하기 위해 아우슈비츠에서 3km 가량 떨어진 비르케나우라는 지역에 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진 아우슈비츠 제2 수용소는 그 크기가 무려 53만여평에 달한다.

수용소 입구
수용소 입구강구섭
위병소 탑에서 내려다 본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 풍경
위병소 탑에서 내려다 본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 풍경강구섭
제2 수용소에는 4천명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가스실과 소각 시설이 갖추어져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대인 뿐 아니라 소련군 전쟁포로, 폴란드 인, 반체제 인사 등 수십만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곳으로 실려온 수감자들은 기차에서 내리면서 바로 수용소 의사의 '심사'를 거쳐 일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된 자는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노동 능력이 없는 병자, 노약자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유럽 각지에서 실려온 수감자 가운데 노동 가능자를 추려 강제노역 인력을 필요로 하는 다른 도시로 다시 보내는 중간집합소 성격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 정문을 통과해 수용소를 가로 질러 가스실 부근에서 끝나는  철로. 멀리 보이는 붉은 건물이 수용소 입구 위병소 .
수용소 정문을 통과해 수용소를 가로 질러 가스실 부근에서 끝나는 철로. 멀리 보이는 붉은 건물이 수용소 입구 위병소 .강구섭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수용소 정문을 통과해 길게 뻗어가다가 갑자기 뚝 끊긴 철로는 그 자체로 공포스런 느낌을 자아낸다. 철로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대량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나치 친위대가 패전선언 1주일 전에 파괴했다는 가스실과 소각시설은 지금도 파괴된 상태로 남겨져 그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수용소 입구의 위병소 탑에 올라가서 내려봐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황량한 벌판에 넓게 퍼져있는 수용소는 그 규모가 엄청났다.

중노동, 굶주림, 전염병과 피부병이 끊이지 않은 열악한 위생 상태, 축축한 습지 위에 기초도 없이 벽돌로 쌓아 올린 목조 건물에서 난방도 없이 얇은 의복 한 벌로 나야했던 겨울 등 영화에서 봤던 그 끔찍한 일들이 반세기 전 이 넓은 수용소 공간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수용소 곳곳을 돌아보면서 이따금 어제 기차역에서 차표를 사기 위해 내 앞에 서 있던, 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아이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의 아빠는 아이가 유모차에 앉아 있으려고 하지 않자 아이를 비행기도 태우고 흔들어 주면서 달랬고 아이는 기분이 좋았는지 나를 보면서 방긋 웃고는 했다.

수용소 소장 회스가 교수형을 당했던 교수대. 그는 아우슈비츠에 살아남은 유대인의 결정에 따라 1947년, 자신이 거주하던 관사 바로 옆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수용소 소장 회스가 교수형을 당했던 교수대. 그는 아우슈비츠에 살아남은 유대인의 결정에 따라 1947년, 자신이 거주하던 관사 바로 옆에서 사형에 처해졌다.강구섭
수용소 인근 지역에 살면서 수용소로 출퇴근했던 나치 친위대 소속 군인들도 어제 봤던 그 아이 아빠처럼 퇴근 후에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회스 또한 제 1 수용소의 출입구 바로 옆에 있는 관사에서 부인을 비롯한 다섯 아이와 함께 생활했다. 그 두 얼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수용소 의사가 도착한 수감자들을 선별하는 장면.
수용소 의사가 도착한 수감자들을 선별하는 장면.강구섭

당시 촬영된 수감자들의 모습.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록은 수용소에 소속된 3명의 전속 사진사에 의해 사진, 필름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2차 대전 후 발견되어 아우슈비츠의 잔혹상을 알려주는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촬영된 수감자들의 모습.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록은 수용소에 소속된 3명의 전속 사진사에 의해 사진, 필름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2차 대전 후 발견되어 아우슈비츠의 잔혹상을 알려주는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강구섭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 세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의 현장을 찾아온 독일인들은 이 비극의 현장에서 무엇을 느낄까. 가이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한번씩 쳐다본 그들은 그저 묵묵히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4시간 가량 가이드 안내가 계속 되면서 몇 사람은 앞서 자리를 떴고 안내가 거의 끝날 무렵까지 남아있던 대학생 남녀 한 쌍과 크라코프로 돌아오는 길에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베를린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야콥은 나치시대 저질러진 독일의 엄청난 죄악을 당연히 인정하지만 60년 전, 앞선 세대에 의해 자행된 일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도 있다는 사죄의 마음을 심정적으로 느끼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야콥은 덧붙여 '아버지는 그때 뭐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어지는, 침묵, 옹호, 때로는 그런 대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전후 독일 가정에서 있었던 나치의 역사를 둘러싼 일반적인 모습들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했다.

몇 년째 독일에 살면서 종종 들어왔던,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야콥과 대화를 나누며 어쩌면 과거 우리의 가해자였던 일본의 오늘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도 저런 생각을 갖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콥의 속내를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만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하튼 독일인들에게 결코 마음 내키는 여행지라고 할 수 없는 이곳까지 먼길을 찾아온 이들이 있다는 것에 일말의 위안을 삼았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1년에 3만5천명 가량 되는 독일인이 이곳을 방문한다.

수용소 곳곳을 돌아보면서 솔직히 말해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만한 겨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이드의 설명을 경청하느라 그렇기도 했지만 눈으로 목도한 참상의 실체 앞에서 그저 경악하고 또 경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이런 비극이 다시는 지구상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50년, 100년,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수백만의 희생자에 대한 사죄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2수용소 가스실 부근에 세워져 있는 희생자추모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매년 1월 27일 이곳에서 추모행사를 갖는다.
제2수용소 가스실 부근에 세워져 있는 희생자추모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매년 1월 27일 이곳에서 추모행사를 갖는다.강구섭

1947년,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건물과 장소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국립 박물관으로 만들어 진 후, 아우슈비츠는 1979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런 비극의 현장이 세계의 문화유산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슬픈 일이지만 유산으로서의 가치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해마다 수십만명이 다녀가는, 이곳을 찾는 한국인만 해도 매년 만 명에 이른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관람하며 곳곳에서 마주친 많은 얼굴과 눈빛들은 당연한 것이지만 대부분 말을 잃은 굳은 모습이었다.

여름날의 여행지로 이곳을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가급적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었으면, 그리고 이런 슬픈 세계문화유산이 지구 땅 어디에도 다시 생겨서는 안 된다는 그 마음을 늘 간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으며 아우슈비츠를 떠났다.

독일어비문 내용은 '이 장소는 인류에게 향한 영원한 절망과 경고의 절규일 것이다. 이곳에서 나치는 150만의 남자, 여자, 아이들을 학살했다. 그들의 다수는 유럽 각지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독일어비문 내용은 '이 장소는 인류에게 향한 영원한 절망과 경고의 절규일 것이다. 이곳에서 나치는 150만의 남자, 여자, 아이들을 학살했다. 그들의 다수는 유럽 각지 출신의 유대인이었다.'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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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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