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만난, 1954년 북한의 함흥재건사업에 참여했던 헬무트씨강구섭
전직 모터 기술 마이스터(명장)였던 할아버지는 당시 150여명의 동독인으로 구성된 지원단의 일원으로 함흥의 주거단지 건설에 참여했고, 그때 평양, 문산 등을 놀러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독 시절의 일이었지만 북한 재건에 독일인이 참여했다는 것에 내가 적잖이 신기해하자 그는 베트남, 구 유고, 폴란드 등도 당시 참여했고, 폴란드는 함흥에 병원을 지었다고 했다. 그 때 나이가 24세였는데 벌써 50년이 흘렀고 3개월 후면 74세가 된다며 할아버지는 세월의 무상함을 되뇌었다.
그런 인연을 갖고 있어서인지 할아버지는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60세 무렵 통일을 경험했던 할아버지와 오늘날 독일 상황, 남북 통일 등에 대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아내와 내가 아우슈비츠에 가는 길이라고 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주 끔찍한 역사, 혼돈의 시간이었다는 말을 짧게 하고는 더 덧붙이지 않았다.
2차 대전 당시 10대 초반이었을 이 노부부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여전히 적지 않은 이곳의 분위기 속에서 이들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초면에 너무 많은 것을 물어보기 뭐해 금방 화제를 바꿨다.
하루저녁 이웃들과 대화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낯설음 때문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고 대신 오후에 읽었던, 어느 날 갑자기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엄마를 도중에 잃어버린 채 아빠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유대인 꼬마소녀의 이야기가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밤새 뒤척이는 사이 어느새 날이 밝았다. 아주 짧은 여행인데 기차길 밖 풍경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6시쯤 일어났다.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간간이 보이는 낡은 폴란드어 간판, 오래된 건물들, 허름한 시골 마을 등 빠르게 지나가는 기차 밖 풍경을 바라보며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만큼이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폴란드에 대해 괜히 공유의식이 느껴졌다.
내가 일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도 일어나셨다. 여행에서 경험한 것을 글로 옮길까 하는데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몇 가지 더 이야기하면서 라이프치히에 한번 놀러오라며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주셨다.
할아버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크라코프 역에 도착했다. 아우슈비츠 뿐 아니라 폴란드에서 가장 볼만한 여행지로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크라코프였음에도 역 앞 버스터미널은 시골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변변한 영어간판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를 찾아보고 왔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몇 번을 물은 끝에 환전을 하고 아우슈비츠행 미니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비극의 역사를 갖고 있는 도시라는 생각 탓인지 버스 바깥 풍경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괜히 무척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류장에 멈춘 버스에 올라, 버스를 가득 메운 여행객들을 무덤덤하게 쳐다보는 현지인들을 이따금 보며 인류 최대 비극의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