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할머니 엉금 엉금 대둔산에 오르다

모녀가 함께 한 주말 단풍여행(1) 대둔산

등록 2004.10.27 10:14수정 2004.10.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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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둔산 (1)

대둔산 (1) ⓒ 김정은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한기는 하루하루가 다르다. 그러고 보니 단풍의 계절인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카운트가 내 머릿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단풍을 좋아하는 이유


대학시절 유독 단풍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단풍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새빨간게 예쁘잖아."

뭐!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싱거운 대답을 해놓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친구에게 나는 왠지 싱거운 질문을 한 이유를 말해줘야 할 것같은 무언의 압력을 느꼈다.

"나는 새빨간 단풍을 보면 겉은 화려하지만 왠지 불쌍한 생각이 들곤 해. 내가 열매를 맺고 편안한 마음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단풍보다 더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르지."

봄, 여름동안 한 일이 없어 잊혀진 배우가 몸속에 응어리졌던 피를 모두 내뿜어 보여주는 마지막 무대와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눈이 시릴 만큼 새빨간 단풍은 이상하게도 애잔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웬일인지 새빨간 단풍잎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어간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비움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것일까?


a 대둔산(2) 대둔산은 지금 단풍이 절정이다.

대둔산(2) 대둔산은 지금 단풍이 절정이다. ⓒ 김정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단풍 드는 날 /도종환


창가에 비치는 가을 햇살이 노곤하게 느껴지는 지난 토요일 오후,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을 느끼기 위해, 붉은 색으로 단장한 단풍잎의 마지막 절정이 담긴 연극을 보기 위해 칠순 노모를 모시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둔산을 올랐다.

아무런 준비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자동차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늦은 오후에 움직이니 어디 대둔산 삼선계단이나마 오르내릴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정 안되면 근처에서 하룻밤 묵고, 오르자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울 톨게이트부터 단풍 여행객을 태운 관광버스와 자동차 사고로 혼잡하게 밀렸던 차량 정체도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결국 오후 3시가 넘어서 대둔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케이블카 승강장에는 한 30분 정도 기다려야 하는 대기조로 북적였다. 산꼭대기까지 케이블카가 다니는 산을 오는데, 왜 귀찮게 등산화를 신으라고 했느냐고 하시는 엄마의 불만을 나는 웃음으로 무마하고 케이블카에 올랐다.

a 삼선바위에서 바라본 대둔산 전경, 저 멀리 금강구름다리가 보인다

삼선바위에서 바라본 대둔산 전경, 저 멀리 금강구름다리가 보인다 ⓒ 김정은

대둔산은 사방이 온통 단풍의 물결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온통 붉은색, 위를 봐도 아래를 봐도 온통 붉은색 천지이다. 물론 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과 눈동자도 붉은 색이다보니 내 마음도 자연스럽게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어느덧 케이블카는 정상에 도착했고, 어머니는 케이블카 승강장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수많은 철제 계단과 가파른 바위들을 보면서 난감해했다.

"거 봐요. 등산화 신길 잘했죠. 여기서는 이렇게 보여도 이 계단만 오르면 지난해 갔던 강천산과 같은 구름다리가 나오니 별로 어렵지 않아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쉬엄쉬엄 가시면 충분히 가실 수 있어요."

약간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딸의 선동성 격려에 고무된 어머니는 철제 계단 난간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천천히 한 걸음씩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다 쉬고 오르다 쉬고, 난간이 없는 바위는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얼마동안 오르니 한 치 앞에 금강 구름다리가 보인다.

구름다리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가뿐하게 넘은 우리 어머니. "이제 다 끝났느냐"며 힘들어하는 눈빛을 보내는 어머니를 나는 못 본 척하며 저만치 까마득하게 보이는 삼선계단을 손으로 가리켰다.

a 삼선계단을 오른 직후의 어머니의 모습, 힘들었던 만큼 해냈다는 자부심도 커보였다.

삼선계단을 오른 직후의 어머니의 모습, 힘들었던 만큼 해냈다는 자부심도 커보였다. ⓒ 김정은

삼선계단을 오르며

"어머니 다음 목표는 저 삼선바위예요. 저 바위는 고려 말 한 재상이 나라가 망한 것을 한탄하며 세 딸을 데리고 이 곳에서 살았는데, 도를 닦다가 세 딸이 모두 신선이 되어 바위로 변했다고 해서 삼선바위라고 하거든요.

그러니 저 삼선바위를 오르면 가슴에 품었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데요. 저기 조그맣게 보이는 빨간색 가파른 계단 보이시죠. 그 계단이 바로 이곳의 명물 삼선계단이에요. 삼선바위를 오르려면 127개의 계단만 오르면 돼요."

그러자 어머니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삼선계단 쪽을 올려다보며 말씀하셨다.

"글쎄, 내가 저길 올라갈 수 있을까? 안될 것 같은데…. 날도 어두워질 텐데…."
"뭐! 여기서는 저렇게 보여도 별로 시간 걸리지 않으니 쉬엄쉬엄 천천히 올라가시면 시간은 충분해요. 그리고 저 삼선계단, 보기에는 저래보여도 양쪽 난간을 꼭 잡고 하늘 쳐다보고 올라가는 거라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내가 보기에 우리 어머니는 충분히 올라가실 수 있을 거예요. 무섭다고 그 절경을 놓치면 케이블카 요금이 아깝잖아요."

케이블카 요금이 비싸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설득하는 나도 참 무서운 인간이라는 생각했다. 사실 삼선계단을 향해 오르는 길은 노인분이 가기에는 험했다.

이번에도 내가 괜히 체력도 약한 어머니를 부추기는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되었지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잘하시리라 믿고 지켜보기로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노인분이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위태롭게 느꼈는지 한마디씩 거든다.

"할머니, 길이 이렇게 험한데 어떻게 가시려구요. 그냥 내려가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씩씩하게 '아직은 괜찮아요"라고 대답하신다. 그런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좀 놓인다. 그러던 어머니도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삼선계단이 보이지 않자, 휴게소 앞에서 나에게 물어본다.

"아직도 멀었니?"
"왜요. 힘드세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힘드시면 그냥 내려갈까요?"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휴게소 주인아저씨가 거든다.

"아휴, 노인 분은 무리예요. 할머니는 여기서 쉬면서 기다리시고, 젊은 사람만 빨리 올라갔다 내려와요."
"얘는 벌써 옛날에 올라갔다 왔는 걸요. 오늘은 순전히 나 구경시키느라 온 건데, 조금 힘들더라도 올라가야죠."

아! 나는 이제까지 어머니 살아생전에 하나라도 더 구경시켜드리겠다는 욕심만 앞섰지, 어머니의 신체적 고통을 알려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런 나의 안타까움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무리하게 올라가시는 것이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였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힘드시면 가시지 말고 우리 내려가요. 삼선계단 안 봐도 금강구름다리 봤으니까, 충분해요."

그러자 어머니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올라가야겠다. 우리 딸 소원 이뤄지라고…."

결국 우리 모녀는 우여곡절 끝에 삼선계단 앞에 도착했다. 막상 삼선계단을 보니, 만만치 않아보였다. 어머니는 또 다시 나에게 확인하셨다.

"정말 괜찮을까?"
"괜찮다니까요. 제가 뒤에서 받치고 가면요. 그리고요 저 삼선계단에서 내려다보는 단풍이 이곳에서 가장 절경이래요."

결국 어머니와 나는 그 가파른 삼선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오르기 시작한 이상 내려가는 길은 없다. 무조건 끝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바람이 그다지 불지 않아 계단의 흔들거림은 심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머니의 뒤를 손으로 받치며, 어머니가 한 걸음 한 걸음 갈 때마다 '영차영차' 구호를 넣었다.

"엄마, 아래 보지 말고 하늘만 보세요. 엄마, 저 멀리를 보세요. 정말 아름답죠. 엄마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힘내세요."

나는 어머니를 격려하고자, 문득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가파른 호흡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일망무제'. 붉게 타는 단풍과 봉오리가 어우러지는 광활한 또 하나의 세상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는 삼선계단을 올라가는데 성공하셨다. 주위 사람들도 놀라서 한마디씩 거든다.

"어머! 할머니가 여기까지 올라오시다니 나도 무섭고 힘들었는데…."

어머니 당신도 이곳을 올라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눈치였으나 사람들의 한마디에 여유롭게 답하시는 품이 예사가 아니다.

"뭘요. 생각보다 그리 무섭지 않던데요."
"그렇죠, 별거 아니죠.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어머니 대단해요."

a 석양 무렵의 대둔산 (1)

석양 무렵의 대둔산 (1) ⓒ 김정은

어느덧 해는 넘어가서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조그만 지나면 순식간에 깜깜해질텐데…. 가는 길이 걱정이다. 케이블카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지만 어머니는 풀린 다리를 참으며 무사히 내려오셨고, 우리는 7시에 마지막으로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삼선계단을 올라갔다 왔다는 여유로움 때문인지, 50분 동안 케이블카를 기다리면서 어머니는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셨다.

"여기를 너무 늦게 온 것 같아. 조금만 빨리 왔으면 마천대 정상까지도 갈 수 있었을텐데…."
"그래요. 정말 시간이 모자라서 아쉬웠어요. 삼선바위에서 조금만 더 가면 마천대 정상인데 말이죠."

a 석양 무렵의 대둔산(2)

석양 무렵의 대둔산(2) ⓒ 김정은

이미 주위는 깜깜해졌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면서 보는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내일 일찌감치 화암사로 가기 위해 근처의 숙박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고산읍에서 아담한 찜질방을 발견하였다.

아! 이 한적한 곳에도 찜질방이 생겼다는 게 놀라울 뿐이어서 최근에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3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몸도 고단했는데,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밤은 찜질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어머니와 함께 솔향기가 은은한 황토방에 누워,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우리 어머니의 이런 자신감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어머니가 연세에 비해 정정하신 것도 어머니의 '하면 된다'는 자신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자신감이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본 후 나 또한 내일의 일정을 위해 고단한 몸을 뉘였다.

"어머니, 사시는 날까지 그런 자신감 잃지 나시고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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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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