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있는 곳이 인도서 가장 위험?

[인도 여행기]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 맥그로드 간즈

등록 2004.11.01 15:54수정 2004.11.0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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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운드(2827미터)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프랑스인 트레커 셀린느.
트리운드(2827미터)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프랑스인 트레커 셀린느.김남희
누군가 내게 인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맥그로드 간즈(McLeod Ganj 1770m)’라고 대답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인도를 아는 사람들은 이 대답에 당황할지 모르겠다.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들어선 곳, 걷는 것만으로도 영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맥그로드 간즈가 가장 위험한 곳이라니?


‘위험’이라는 개념을 물리적인 위험과 정서적인 위험으로 나눈다면 - 물론 자의적 기준이다 - 나는 지금 정서적 위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맥그로드 간즈의 정서적 위험도는 인도 전역에서 단연 상위권을 차지한다. 다시 말해 그 위험도는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도나 사기 같은 범죄의 발생이 아니라, 이 작은 마을이 뿜어내는 마약보다 강한 중독성과 여행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마는 마취력 때문이다.

3일을 예정하고 와서 30일을 머물기는 예사고, 계획한 여행 일정을 다 포기하고 이곳에서만 머물다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여행자들의 이야기마저 심심찮게 들리는 곳이 바로 맥그로드 간즈다.

해병대 훈련을 방불케 하는 강도 높고 타이트한 일정으로 이 넓은 나라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단기 여행자들마저 이곳에 짐을 풀었다 하면 하는 일 없이 어슬렁거리며 세월을 보내고 마니,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남쪽의 더위에 지친 여행자들을 회복시키는 서늘하고 기분 좋은 기후 때문인 걸까?


인도 어디를 가더라도 따라붙는 걸인의 수와 그 집요함의 정도가 현저히 낮기 때문에?

혹은 눈 들면 어디에나 푸른 산과 나무가 가득한 이곳의 풍경 때문일까?


싸고 맛있는 음식 - 인도나 티베트 음식은 물론이고 한국식당도 두 개나 있고,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식당까지 있어 여행자를 행복한 고민에 빠뜨린다 - 이 주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아니다.

맥그로드 간즈의 가장 큰 힘은 바로, 눈이 마주치면 “타쉬 델렉!(안녕하세요)”하며 미소를 보내는 순박한 티베트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이곳을 ‘인도라는 대륙’의 수많은 관광지와 구별 짓는 힘은 바로 티베탄들인 것이다.

오체투지 중인 티베탄들. 남걀 곰파
오체투지 중인 티베탄들. 남걀 곰파김남희
어린 비구니 스님이 경전 토론 중 수줍게 웃고 있다.
어린 비구니 스님이 경전 토론 중 수줍게 웃고 있다.김남희
석 달의 서울 생활을 마치고 다시 인도로 돌아왔을 때, 나는 바로 맥그로드 간즈로 올라왔다.

그날 아침, 화들짝 놀란 미소로 꼭 안아주고, 짜이(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고 끓인 인도의 대표적인 차)를 대접해 주시던 단골 구멍가게의 돌마 아줌마.

매일 새벽 남걀 사원을 찾아 오체투지(이마와 양 팔꿈치, 양 무릎의 다섯 군데를 땅에 닿게끔 온 몸을 던지는 티베트식 절) 중인 티베트인들 곁에서 108배를 올릴 때면 말없이 내 무릎 앞에 방석을 놓아주고 가는 사람들.

비구니 사원을 기웃거리다 부엌에 들어섰을 때, 자신이 먹던 밥그릇을 내밀어 나를 공양하던 여스님들.

눈이 마주치면 수줍은 미소를 돌려주고, 금세 친구처럼 인사를 주고받게 되는 거리의 노점상들.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가며 거리에서 사귄 친구들 때문에 귀가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만 간다.

정 많고 소박한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미소가 바로 맥그로드 간즈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다.

맥그로드 간즈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하다면 무한하고, 빈약하다면 빈약하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무엇을 즐기느냐에 달렸으니까.

몇 가지 모법답안을 제시해 본다면,

선라이즈 카페의 야외 의자에 앉아 이 동네 최고의 짜이를 마시며 지나가는 여행자들과 시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기.

숙소 방에서 창가로 의자를 돌려놓고 앉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앞산을 바라보는 일.

‘옴 카페’나 ‘닉스 이탈리안 식당’ 같은 전망 좋은 카페에서 티베트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그리운 이들에게 엽서를 쓰는 일.

몇 안 되는 주점 중의 하나인 맥그로 카페의 옥상에서 애플 와인 마시기.

끝에서 끝까지 30분이면 걸을 수 있는 작은 마을에 3개나 있는 극장(그 중 한 극장은 놀랍게도 스크린이 삼성 프로젝션 TV다)을 기웃거리며 영화 보기.

이런 일들에도 지치면 트리운드(Triund 2827m)로 하루짜리 트레킹을 다녀오거나 박수폭포까지 짧은 산책 다녀오기.

시도 때도 없이 ‘리’에 들러 빼마가 타주는 진한 생강차 한 잔을 놓고 마주앉아 수다 떨기.

진지한 학구파라면 수많은 강좌 - 요가나 명상, 불교 공부는 물론 마사지, 요리, 기 치료, 어학 등 선택의 폭은 깊고도 넓다 - 에 등록해 배우는 즐거움을 맛보기.

‘따로 또 같이’ 독서 중인 스님들. 남걀 곰파
‘따로 또 같이’ 독서 중인 스님들. 남걀 곰파김남희
설산을 배경으로 토론 중인 비구니 스님들. 당랑 권법을 연상케 하는 자세가 재미있다.
설산을 배경으로 토론 중인 비구니 스님들. 당랑 권법을 연상케 하는 자세가 재미있다.김남희
맥그로드 간즈는 그런 곳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만하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곳.

여행지에서조차 우리를 짓누르던 속도전의 강박에서 벗어나 게으름의 미덕을 한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끈덕지게 달라붙는 ‘삐끼’와 ‘한량’들을 떨치기 위해 구기고 다녔던 인상을 펴고 활짝 웃을 수 있는 곳.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건네는 미소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곳이 맥그로드 간즈이다.

역설적이게도 티베트는 중국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은 대신 티베트 불교와 문화를 전 세계에 알렸다.

‘맥그로드 간즈에는 티베탄보다 서양인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이곳은 서양인들의 대안적 신앙의 중심지로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지난 2000년간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목수 아들에게 무릎 꿇었던 서양인들은 오늘 달라이 라마 앞에 온 몸을 던지며 귀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밀려드는 외부인들과 그들의 문화는 당연히 맥그로드 간즈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여전히 달라이 라마의 얼굴을 먼 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마니차(경전이 들어있어서 돌리는 것만으로 경전을 읽는 효과가 있다고 믿는 기구)를 돌리며 하루 종일 거리를 서성이는 노파들이 있는 반면, 지금 이곳 젊은이들은 수영복 심사까지 곁들여 벌어진 ‘미스 티베트 대회’에 환호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함이 앞선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 반대하는 단식농성이 벌어지고 있다.

세상 모든 곳의 청춘들이 그렇듯, 이곳의 젊은이들 역시 그들의 현재에 만족하는 것 같지는 않다.

힌디팝에 열광하고, 헐리우드 영화에 환호하고, 무스를 발라 넘긴 머리에 꼭 끼는 청바지를 입고 거리를 배회하는 숱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 ‘티베탄 제비를 조심하라’는 말이 돌기도 한다 - 서글픔이 앞서는 건 정당한 감정일까?

이제 모든 문화는 서로 교류하며 뒤섞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세계의 젊은이들이 하나의 모습으로 획일화되어 가는 것은 슬픔을 넘어선 절망이다.

그들 역시 세월이 흘러 고유의 문화가 사라지거나 심하게 변형된 후에야 잃어버린 것의 가치를 깨달을 것을, 먼저 겪어낸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까?

티베탄도, 인디언도, 서양인도 되지 못하는 이곳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갈까?

티베트 고유의 문화를 잃어버린 맥그로드 간즈에도 여행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남을까?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걷고 있는 동안에도 그런 변화의 흐름을 목도하는 일은 고통스럽기까지 한 여러 질문들을 남긴다.

그 모든 변화를 이끌고 오는 외부인인 처지에 변화를 바라지 않는 존재의 모순도 부끄럽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티베탄의 사진을 들고 단식 중인 농성자들(왼쪽). “티베트를 위해 궐기하라”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 항의하며 단식 중인 티베탄들.
사형선고가 내려진 티베탄의 사진을 들고 단식 중인 농성자들(왼쪽). “티베트를 위해 궐기하라”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 항의하며 단식 중인 티베탄들.전해리
어쩔 수 없는 태생적 염세주의자인 내게, 맥그로드 간즈의 미래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여행에 지친 방랑자들에게 맥그로드 간즈가 건네는 손길에는 아직 뜨거운 온기가 남아 있다.

그 온기가 식지 않는 한, 델리에서 떠나는 다람살라행 야간 버스 안에는 여전히 무거운 배낭에 어깨를 기울인 여행자들이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린 꿈을 좇는 고단한 청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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