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가자우리>-신영복의 작품(http://www.shinyoungbok.pe.kr)신영복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인해 혼란스럽던 1991년... 시대인식을 바로세워 준 책
책을 처음 접했던 1991년 대학 교정은 수많은 열사들로 넘쳐났다. 4월 26일 학원자주화투쟁과 노태우 정권의 비리를 규탄하던 시위 중 백골단에 의해 죽어간 강경대 열사를 시작으로 숭고한 젊은이들이 산화해 갔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김철수, 이정순, 정상순, 김귀정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죽음은 대학 1학년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버거운 '현실'이었다. 그 당시 대학은 낭만을 쫓아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상에 대한 막연한 추구가 아닌 현실을 직시하며 시위와 논쟁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그 때 지식인들의 논쟁은 혼란스러움을 더욱 자극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당시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조선일보 기고문이었다.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당신들은 흔히 「지도」라는 말을 쓴다. 또 「선동」이란 말도 즐겨 쓴다. 스스로도 확신 못하는 환상적 전망을 가지고 감히 누구를 지도하고 누구를 선동하려 하는가? 더욱이 죽음을 찬양하고 요구하는가? 제정신인가, 아닌가?
생명은 자기 목숨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서운 것인데 하물며 남의 죽음을 제멋대로 부풀려 좌지우지 정치적 목표아래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인식은 삶의 체험과 투철한 자기성찰에서 출발한다. 91년 나의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묘하게 연결됐다. 이 책은 진지한 삶의 성찰,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판단, 어떻게 지성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되새겨 주었다.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老)가 원숙이, 소(少)가 청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年月)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1983년 1월 13일 대전에서 '세월의 흔적이 주는 의미')
2004년 시대인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1988년 첫 출판된 이후 몇 번의 개정판을 거쳤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1990년 11월 20일 햇빛출판사가 발행한 초판이다.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개정판과는 내용에 있어 조금 다르다. 그럼에도 초판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출판 당시의 치열함과 생생함이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가 기나긴 시간 동안 수많은 것들에 베풀었던 끝없는 사랑과 관심을 한 권의 책으로 모두 만났다는 것은 삶의 큰 축복이었다.
시간이 흘러 2004년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13년만에 다시 만났다. 1991년도가 수많은 열사들이 산화해 가며 죽음과 민주화에 대한 인식으로 혼란스러웠다면 2004년은 '관습법'으로 대변되는 사회 인식으로 혼란스럽다.
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의 신영복의 사색이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무지(無智)로 인하여 지구를 감옥 아닌 감옥으로 만들어 스스로 옥살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갇혀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시대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