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여수시 화양면 고진리(古鎭里) 고내(古內)마을. 마을을 들어서는데 장승이 길 양쪽에 지켜 서 있다.
'벅수'라고 하는 이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의 재앙과 질병을 막아준다는 토속적인 민속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을 양쪽에 세웠다. "동쪽에 세워진 벅수 화정려(火正黎)는 동쪽 귀신을, 남쪽에 세워진 벅수 남정중(南正重)은 남쪽 귀신을 쫒아낸다는 뜻으로 중국사기에 그 문헌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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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 벅수장승이 세워져 있는 고내리 마을 ⓒ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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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벅수 화정려(火正黎) ⓒ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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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벅수 남정중(南正重) ⓒ 김학수
무심코 돌아서려는데 의아한 비석 3개가 눈에 들어온다.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뜻하지 않게 이 동네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주둔지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어 그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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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돌산진의 3명의 수군장군 공덕비 ⓒ 김학수
고돌산진(古突山鎭)
옛날 수군진(水軍鎭)으로써 설치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태종8년 정월)기록에 돌산포만호(突山浦萬戶)의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말 또는 적어도 이조초에 설진(說鎭)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왜구방어에 힘을 기울여 남해안의 수군진을 대폭증설하여, 서기 1611년(광해군3년)에는 옛날의 돌산포진을 고돌산진으로 개칭하여 새로운 수군진을 출발시키고 권관(權官)을 두었다가 그 후 별장(別蔣)으로 낮추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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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돌산진 고내리 전경 ⓒ 김학수
이런 내용문을 보고서 좀더 자세한 유래를 찾아보기 위하여 동네 어른들이 계실 법한 노인정을 찾았다. 그곳에서 김채봉(72), 차영철(73), 최천석(72) 할아버지들을 만나 뵙고 이 동네의 역사적인 유래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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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김채봉,차영철,최천석 할아버지 ⓒ 김학수
원래 이 동네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고돌산진이라 해서 우리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그 규모가 엄청난 수군기지였단다. 당시 이곳에 김씨, 차씨, 박씨 성을 가진 3명의 엄호장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알 수 없고, 대신 대포가 달린 큰 전함을 지휘하던 장군과 나머지 두 장군은 보급선을 지휘하던 역할을 수행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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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함이 있었던 고돌산진 모습 ⓒ 김학수
그때 불리던 고돌산진이라는 지명이 지금은 고진리(古鎭里)로 불리고 있으며, 이 마을을 에워싸고 큰 토성(土城)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성 바깥 동네를 고외(古外)리,성 안쪽 마을을 고내(古內)리라 부르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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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성의 능선이 보이는 고내리 마을 ⓒ 김학수
옛날 성의 모습이 남아 있을 때만 해도 이 두 마을 사람들이 합해서 '성'제를 지냈는데 차츰 성의 형태가 사라지면서부터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밤에 고내리 사람들만이 뜻을 모아 제를 지낸다고 한다.
토성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마을 뒤편의 성터에 가 보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성의 형태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바위 덩어리만이 이곳이 성터였다는 것을 말해주듯 가을 억새의 흔들림 속에 가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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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져 있는 바위가 성터 였음을 알려준다 ⓒ 김학수
밭의 넓이를 넓히려는 농부의 작은 욕심이었을까? 우리 후손들에게 잘 보존해서 문화유산으로 남겨줘야 할 이 토성이 농부들의 조금씩 땅 넓히기 때문에 성의 형태가 깎여나가고 있는 실정이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관계 시(市)의 담당부서에서 이러한 사라지는 문화재를 관리해야 할 작은 의무에 충실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취재 도중 멀리 보이는 성을 가리키며, 옛날을 회상하시던 차영철 할아버지의 모습이 환한 미소로 간직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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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츰 밭으로 변해가는 토성의 모습 ⓒ 김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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