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말리부 해변 노을과 새벽어스름에 대한 단상

다르지만 닮은, 그리고 짧아서 더욱 아름다운...

등록 2004.11.05 07:28수정 2004.11.0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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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말리부 해변을 찾았다. 유명한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1번 프리웨이를 타고 북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주차하고 내려서니 비릿한 바다 내음보다 갈매기와 펠리컨의 우렁찬 목청이 먼저 반긴다.


배우근
해변 둔치의 카페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0시간이 넘게 건너온 바다. 망망대해다.

한없이 넓은 바다는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과 나뉘어 있다. 짙푸른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은 세상을 반으로 나누고 갈매기들이 그림을 그리듯 그곳에서 가들막거린다.

배우근
보아도 보아도 끝이 없는 무한한 바다에 홀렸을까? 시나브로 길어진 그림자와 거뭇해진 백사장이 저녁을 알린다. 바다 건너 한국은 각다분한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겠지?

삶이 태어난 공간을 터전 삼고 주어진 시간을 쟁기 삼아 일궈 가는 것이라면, 이곳은 나와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공간이 바뀌어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이곳은 생소한 곳이고 나는 한낱 이방인일 뿐이다.


배우근
부질없는 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수평선에 그렁거리던 석양은 바다위로 붉은 눈물을 주룩 쏟으며 심해의 자궁으로 침전하고, 붉은 기운을 가득 머금은 노을이 짙푸른 바다 끝에서부터 난질거린다. 푸른 물을 먹인 한지에 오렌지 물감이 퍼지듯 서로의 몸을 자연스레 섞는다.

그림자를 만드는 낮도 아니고 가로등을 밝히는 밤도 아닌 노을이 하늘과 바다를 어루만진다. 이 시간은 낮과 밤의 공존이 만드는 새로운 판타지다.


배우근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어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세상이 한 몸이 되어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인다. 헝클어진 생각의 뿌리까지 석양에 물들어 한 조각 붉음이 될 수 있는 시간… 노을이 지는 말리부 해변은, 그렇게 그렇게, 아늑한 밤을 약속했다.

숙소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이즈막한 밤에 홀로 떨어져 있으니, 가장 만만한 것이 책이다. 책을 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출렁이는 촛불너머 보이는 검은 창문, 그곳에 서늘한 푸름이 한 점 돋아나 있다.

배우근
일어서서 창 밖을 내다보니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야자수의 가늣한 몸매가 어둠 속에서 푸르게 돋아나 있다. 어느새 새벽녘, 쪽빛 융단이 새벽 하늘에 서서히 깔리며 붉은 해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배우근
밤과 아침이 공존하는 새벽 어스름은 새로운 하루의 선물, 미리내가 흐르던 검은 장막에 쪽빛이 점점 번지고 지평선에선 돋을 볕의 희붓한 기운이 시나브로 아침을 밝힌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나듯, 아침이 어둠을 향해 따뜻한 입김을 불고 있다. 내 몸에도 조금씩 온기가 퍼진다.

배우근
그러나 아침을 알리는 새벽어스름도 말리부 해변의 노을처럼 가뭇없이 사라지겠지. 다르지만 너무나 닮은 노을과 새벽어스름, 만날 수 없는 시간의 벽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이 둘은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아우르며 만드는 공존의 아름다움이다. 화려하지만 세상을 편안하게 만들고, 웅장하지만 새털처럼 조용히 움직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일상의 고단함을 잊게 하며 잡념의 잔가지를 걸러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표현하기 위해 애썼지만 단지 환영만을 남겼을 뿐, 자연이 만들어내는 노을과 새벽의 아름다움은 생명체처럼 살아서 숨을 쉰다. 그러나 너무나 짧아서 아쉽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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