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친일문학론' 저술 이후 본격적인 친일연구 돌입 | | | 임종국 선생님 행적 | | | | 임종국 선생님께서는 1929년 10월 26일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님의 4남 3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일곱 살 때 아버님이 교회 일로 상경하게 되자, 소년 종국도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선생님께서는 1980년 천안으로 내려가실 때까지, 거의 40년을 서울에서 사셨습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던 해엔, 중학교 3학년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때 열일곱 살 소년으로서, 일본군의 퇴각이란 충격적인 경험을 하셨고, 그것은 선생님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하셨는데, 그럼에도 일찍이 형성된 문학에 대한 열정과 미련은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1959년, 선생님은 ‘문학예술’지에 ‘비(碑)’란 제목의 시를 발표하심으로써, 정식으로 문단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일생을 통해 가장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 시기에 하셨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신 뒤로 두어 해 동안은, 신구문화사란 출판사에서 근무하신 적도 있습니다.
1965년 한일회담은 임종국 선생님의 생애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는 서른 일곱 살, 문학사회사를 집중해 연구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연구가 한일회담의 반민족적 행위와 접목이 되면서, 그것은 친일연구의 싹이 되었고, 결실은 1966년 ‘친일문학론’의 탄생으로 나타났습니다.
선생님은 ‘친일문학론’이란 큰 저서를 내신 뒤에 한동안 공백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충전된 힘으로, 다시 본격적인 친일 연구에 들어가신 때는 1970년대였습니다. 이 시기의 연구 영역은 더욱 넓어져서,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군사·예술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친일문제를 다루게 되었고, 연구 방법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고찰이었습니다.
집필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80년대엔, 선생님께선, 친일파 개개인의 친일행적은 물론, 그 집안의 친일 내력까지도,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가 되셨습니다.
1980년, 선생님은 건강을 회복하고 집필에도 전념하기 위해서,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짓고, 요산재(樂山齋)라 이름지은 뒤, 줄곧 이 곳에서 일제침략사와 친일파들의 배족사를 규명해 나가셨습니다. 83년 ‘일제침략과 친일파’, 84년 ‘밤의 일제침략사’, 85년 ‘일제하의 사상탄압’, 86년 ‘친일문학 작품선집’, 87년 ‘친일논설집’, 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를 차례로 펴내셨습니다.
그 뒤로는, 친일문제 연구에 체계를 세우고, 또한 친일문제를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 ‘친일파총서’ 열 권을 펴내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지병과 맞선 싸움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신 선생님께선, 1989년 11월12일 0시40분에, 숙원사업을 마저 이루지 못하시고, 조용히 운명하셨습니다.
민족의 정기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역사의 상처를 한몸에 끌어안고, 반민족 범죄자들과 싸워 왔던, 시인이시며, 문학평론가시고, 재야사학자이였던 임종국 선생님은, 자신의 큰 뜻을 후학들에게 남기고, 그만 저희들 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