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카드. 출처: <상징의 비밀> (문학동네)
그리고 2004년 시월의 마지막 날, 서울 신촌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낙향했던 친구가 서울로 올라 온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동안 얼굴을 전혀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다섯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색함 때문이었을까,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함께 본 영화는 실망, 그 자체였고 저녁 먹을 곳을 찾아서 신촌을 헤매야 했다. 결국 들어간 음식점의 맛과 서비스는 최악이었고 종업원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친구의 허벅지에 뜨거운 차를 쏟기까지 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타로카드 점 보러 가는 거 어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고 순간 우리는 "그래, 좋아"라고 답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타로카드 점은 질문을 하나 던진 다음 타로카드를 뒤집어서 나온 점괘를 읽어 점을 본다. 타로는 통계에 근거하거나 혹은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을 예언하는 게 아니다. 점을 보는 사람이 직접 카드를 뽑고 점괘 또한 '열린' 가능성 정도로 여긴다. 흥미진진한, 약간 영험한 카운슬링 정도라고 할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대 앞 타로카드 카페를 찾았다. 유일한 남자였던 한 친구는 고시생답게(?) 앞날에 대해 궁금한 게 없다고 해 결국 여자 넷만 카페의 사장 아저씨에게서 점을 봤다.
"빨리 회사 때려 치세욧!"
"그곳에 계속 있으면 발전이 없어요. 봐요, '장님'이잖아요."
직장 문제로 고민하던 동갑내기 친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더니 사장 아저씨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가 뒤집은 카드에는 눈을 가린 장님이 그려져 있었다. 암울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그 카드에 친구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월급쟁이말고 평생 프리랜서로 살고 싶어하는 그 친구는 사진을 좋아한다. 바쁜 직장 생활에도 강좌를 들으며 사진을 배웠고 만 서른이 되기 전에 기필코 외국에 나가 사진 공부도 하고 세계여행도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불안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만으로 서른이면 한국 나이로 서른하나, 서른둘인데 그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지금 직장에서 월급이나 받으며 조용히 살까 등등 소심함이 그녀를 흔들기 시작한 거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 타로 카드가 번갯불을 때려 준 거다. 빨리 뭔가 시작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낭비하게 될 거라고. 아저씨가 "해외에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너스 덕담까지 하니 친구 입이 찢어진다. 그런데 사족 하나. "양자리에게 사랑은 사치에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싱글즈> 동미의 운명을 선고 받다!
"결혼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을까요?" 나보다 한살 어린 스물여덟살 여자 후배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지금껏 연애 한번 하지 않은 게 틀림없는 그 녀석은 오랫동안 결혼이 필요없다고 생각해 왔단다. 다들 피해 간다는 기관의 출입기자로 있는 그녀에게 분명 결혼은 '필수'보다는 '선택'처럼 보인다.
카드가 뒤집어지고 이런, 조개 안에 '진주'가 들어 있다. "결혼하는 게 좋겠네요. 자식이 있는데요." 똑같은 카드가 2장이나 나왔는데 아저씨 말이 물고기자리는 결혼하는 게 좋단다. 결혼 생각도 없는데 자식이 있다고, 이걸 어떻게 해석해나? "너, (영화 <싱글즈>의 동미처럼) 싱글맘 될 건가 보다." 순간 좌중은 깊은 침묵에 빠져 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키워 줄게." "……언니, 진짜죠?" "응." "……."
그렇게 후배의 미래는 '싱글맘'이 되어 버렸다. 자식이 생기면 낳아서 잘 키우면 된다, 그리고 꼭 결혼해야 자식을 낳는 건 아니다. 우리는 철딱서니 없게도 그렇게 결론내렸다. 한국 사회에서 <싱글즈>의 동미와 나난처럼, 혹은 <안토니아스 라인>의 여자들처럼 사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결혼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람을 억지로 등 떠밀고 싶지는 않았다.
스물아홉에 집에서 기어 나오려고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