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잎처럼 지고 싶어라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52)

등록 2004.11.07 23:07수정 2004.11.0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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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도 오래 타면


자동차도 오래 타면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아진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일 게다. 아무튼 그동안 큰 병으로 병원 신세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한 일이다. 엊그제(4일) 자고 일어나자 눈자위가 빨갛게 충혈이 되었다. 눈을 너무 혹사시켜서 그럴 테지 하고서, 하루를 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 정도가 좀 더 심했다.

아무래도 전문의에게 진찰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서울 광화문 ㄱ 안과에다 전화로 예약을 하자 다음날(6일)밖에 안 된다고 했다. 일단 예약을 해두고 다음날을 기다리는 데 여간 불편치 않았다.

a 가을바람에 지는 떨잎

가을바람에 지는 떨잎 ⓒ 박도

점심을 든 후 아무래도 하루라도 빨리 치료받고자 후다닥 차비를 차리고 아내에게 부탁하여 승용차로 새말휴게소로 간 다음 서울행 직행 버스에 올랐다. 서울에 도착 즈음에는 궂은비가 내렸다. 빗길에 부지런히 갔더니 다행히 접수마감시간 전에 병원에 이르렀다.

한 시간여 기다린 끝에 진찰을 받았다. 안구 검안을 마친 의사는 유행성 각결막염이라고 진단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실 나는 다른 어느 기관이 나빠서 그 증상이 눈으로 나타난 합병증이 아닐까 하고 바짝 긴장했다.

의사는 푹 쉬면서 잘 치료하고 월요일에 오라는 걸 하루 앞당겨 일요일 오전으로 수정 예약했다.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먹는 약과 눈에 넣는 안약을 조제 받아 밖으로 나왔다. 그 새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그대로 맞으며 서울 집으로 향했다.

이튿날은 토요일로 하루 서울 집에서 쉬기로 작정했다. 늘 만지던 컴퓨터를 만지지 않자 좀이 쑤셨다. 나도 그 새 문명중독자가 됐나 보다. 눈을 쉬게 하려고 책보는 일도, 텔레비전 보는 일도, 삼가자 마땅히 시간 보낼 일이 없어서 고역이었다.


마침 옆집 오 집사 아드님 결혼식 날이라 아침 일찍 축의금만 전했더니 꼭 참석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눈 때문에 그냥 집에서 쉬겠다고 하자, 이따가 봐서 핏발이 수그러들면 꼭 와서 축하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웃간 축의금만 주는 게 예의가 아니라 조금 미안했는데 오 집사가 예식장에 가면서 또 꼭 와달라고 다시 부탁하기에, 눈을 보자 그동안 열심히 안약 넣고 약을 제때에 먹은 탓으로 충혈이 조금 사그라진 것 같아서 차비를 차리고 나섰다.


광화문의 한 교회에서 혼인예식을 보고나자 2시가 조금 지났다. 토요일 오후 갑자기 친구에게 전화하기도, 그래서 망설이다가 길 건너편 시네큐브광화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는 길에 광명약국 앞 구두수선소에 들르자, 주인은 오늘도 열심히 구두를 닦고 있었다.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반기면서 뭐라고 손짓을 하는데 반갑다는 인사말 같았다. 나는 목례로 화답하고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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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에서 만난 한 젊은 구두 수선공

영화관에 가려고 ㅎ 생명보험건물 지하 1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2층으로 내려가는데 막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에, 시인 정희성 선생이 번쩍 손을 치켜들면서 반가운 인사를 했다.

잠깐 새 나는 지하2층에, 정 선생은 지하 1층에 도착했다. 그러자 정 선생이 다시 지하2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토요일 일찍 수업을 끝내고 귀갓길에 영화 한 편 보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우선 매표소로 가서 시간을 확인하자 다음 회 상영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시간이 남아 지하 1층 커피 집에 가서 정담을 나누었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정 선생님과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우선 나이가 같고, 교사라는 점, 국어선생이라는 점, 교직 경력이 비슷하다는 점, 거기다가 학교까지 이웃 학교라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퇴근 무렵 두 학교 중간지점에서 만나 냉면도 같이 먹고 차도 마시기도 했다.

만나 얘기를 나누면 얘기조차도 공통점이 많았다. 집 아이들 얘기를 나누면 똑같이 남매를 두었고, 걔네들의 학교생활(학생회 간부)조차도 비슷했다. 정 선생은 아직도 현직에 머물고 있는 바, 주로 퇴직 후 나의 안흥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물었고, 나는 교단생활 얘기를 물었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살고 싶으므로
- 정희성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정 선생이나 나나 부모로서 아직도 빚을 다 갚지 못한(여의지 못한)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광화문에서 헤어졌다. 당신은 1, 2관에서 상영하는 두 편 다 보았는데 1관에서 상영하는 <비키퍼(The beekeeper)>는 영화의 주인공이 전직교사이라 더 정서상 맞을 거라면서 추천하고 떠났다.

이른 봄,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고 평생직장이던 학교를 떠난 스피로는 이제 가업을 이어 꿀벌치기의 길을 떠난다. 낡은 트럭 뒤에 벌통을 가득 싣고 히스, 오렌지, 클로버, 백리향… 꽃의 행렬을 따라…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꿀벌치기는 언제나 축제 같았지만.

이제는 몇 남지 않은 동료들과 겨우 지친 얼굴을 마주할 뿐… 앙상한 추억만 되새기던 쓸쓸한 어느 날 밤, 그는 히치하이크 소녀를 트럭에 태우게 되고 갈 곳 없는 소녀를 자신이 묵는 방에 재워준다. 소녀는 스피로를 계속 유혹하는데….


a 시냇물에 떨어진 잎들

시냇물에 떨어진 잎들 ⓒ 박도

그리스의 명감독 앙겔로폴로스의 영상 미학을 배우 마스트로얀니가 잘 소화시켰다. 영화관을 나오자 밖은 그새 어둠에 묻혔다. 광화문 네모진 포도를 걷는데 샛노란 은행나무 잎이 떨어진다.

계절 탓인지, 나이 탓인지, 영화의 주인공이 죽음으로 끝난 탓인지, 갑자기 은행나무 떨잎처럼 지고 싶다. 제 몫을 다하고 내년에 돋아날 잎의 거름이 되고자 떨어지는 떨잎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해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 욕심이다. 어디 자기 일을 다 마치고 떠나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너는 인생이란 거대한 도시의 시민이었다. 지내온 날짜를 손으로 세지 마라. 세월의 짧음을 통탄하지 마라. 왜냐하면 너를 이곳으로 보낸 자는 불공평한 재판관이나 폭군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연출가의 명령으로 배우가 무대를 떠나는 것과 같이 자연은 너를 이곳으로 보냈던 것이다. 아직 5막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고 너는 말하려느냐?

진실로 인생이란 때로 3막으로 완성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극작가가 할 일이지 결코 너의 소관은 아닌 것이다. 선의로 무대에서 물러나라. 너의 역할을 중지시키는 것이 어떤 큰 선의의 명령인지도 모르지 않느냐?
-<페이터의 산문> 중에서


떨잎처럼 지는 날이 그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날을 담담히 맞을 수 있도록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겠다. 하지만 그날까지 남은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도록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하늘에 빌고 빈다. 이 바람도 나의 주제 넘는 욕심일까?

하늘이시여! 당신 뜻대로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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