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는 어차피 한글이다, 보면 보인다"

[교단일기] 공부와 시험에 대한 고1 학생의 뼈 있는 넋두리

등록 2004.11.08 15:17수정 2005.08.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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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 모 고등학교의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얼마 전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우리 반 아이들에게 소감을 적어 보라고 했다. 자가 진단을 통해 원인도 분석하고, 다음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진짜 열심히 공부했더니 좀 올랐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뭘 사달라고 하지? / 벼락치기를 해서 망쳤다. 집중력이 부족했다. / 이번에도 아는 문제를 틀렸다. 왜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 솔직히 노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점수가 너무 나쁘다. 집에 어떻게 들어가지. / 아~ 죽고만 싶다! 이제는 평소부터 더 열심히 공부해서 다음 시험을 진짜 잘 보아야겠다."

우리 반 아이들의 시험 소감문
우리 반 아이들의 시험 소감문김형태
아이들의 반응은 천태만상이었지만 대부분 예상했던 소감이었다. 그런데, 꼭 한명의 예외자가 있었다.

우리 반 영호(가명)의 것이었다. 그 소감문을 받고 나서 여러 날을 교무수첩에 끼워 넣고 다녔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나 혼자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의 동의를 얻어 이렇게 올린다.

영호는 과목별로 자기 진단을 해 놓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호의 소감문
영호의 소감문김형태
* 수학 : 점점 점수가 멀어진다. 느껴진다. 아니 이미 왔다. 큰일이다. 느끼기 전에 온 것이다. 만회할 수 있을까? 혹시 보충(꼴찌에서 20명 정도의 학생을 상대로 하는 특별 보충수업으로 일종의 나머지 공부)에 걸리는 것은 아니겠지. 초조함과 불안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수학을 이렇게 놔둘 수만은 없어 1 대 1 과외를 한다. 일단 이것으로 안심이다.


* 영어 : 정말 영어도 자신이 없다. 문법의 깊이가 너무 깊다. 그래도 들어가야 한다. 한번 빠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늪처럼 깊이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두렵다. 그래서 아직…. 그래도 들어가야 한다. 꼭 들어가야 한다. 얼마 안 남았다. 시간이 없다. 무섭다. 단어는 친근하다. 선생님께서 적어 주는 단어들 위주로 외운다. 그리곤 친해진다. 친하지 않은 단어들과도 금방 친해질 거다.

* 국어 : 담임 선생님 과목이다. 아~ 부끄럽고 창피하다. 매일 하는 과목인데도 정말 헤어나올 수 없다. 마치 블랙홀처럼 말이다. 그래도 70점대 나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없다. 시간이 없다. 나와야 한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빨리….


* 과학 : 4대 과목 중 하나. 이건 매 시간 고문 당하는 느낌이다. 날 찌른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정신을 차려 본다. 어딘지 모르겠다. 또 정신을 차려 본다. 저 멀리 있다. 잡으려 해도 닿지 않는다. 저기 있다. 너무 멀다. 이젠 보이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저 멀리 있는데 따라가기도 벅차다.

* 사회 : 그냥 친구 같다. 이름을 알고 얼굴은 알아도 같이 놀진 않는 친구말이다. 필요할 때마다 보면 생각난다. 친하진 않아도 친해지려 한다.

* 국사 : 우리 나라 역사, 아~ 배울수록 짜증이 난다. 지금 배우는 단원만일까? 부정부패로 온 나라가 썩어간다. 국민들이 고통에 허덕거린다. 불쌍하고 화난다. 마치 현재의 우리 사회를 보는 것 같다. 어느 나라나 다 그런 것일까? 아니면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일까? 국사는 어차피 한글이다. 보면 보인다. 그러나 안경이다. 더 잘 보여야 한다. 이제 안경을 닦을 때이다.

* 한문 : 중국의 언어인 한문, 어렵다. 한편으론 쉽다. 쉬워야 한다. 당연히 쉬웠어야 한다. 그런데도 안 보인다. 시력이 점점 더 떨어진다. 라식 수술? 그것을 하면 잘 보일까? 한번 해 보기 전에 안경을 쓴다. 어라? 보이긴 하네. 그러나 안경도 이젠 잘 보이지 않는다. 역시 라식 수술을 받아야겠다.

* 도덕 : 하하~ 웃음이 먼저 나온다. 쉬운 줄 알았다. 얕잡아 봤다. 또 웃는다. 어이없다. 생각보다 세다. 그러나 이길 수 있다. 어디 한번 다시 또 붙어 보자.

시험은 점점 앞으로 더 어려워지겠지. 아니 확실히 어려워졌다. 계단이다. 그래, 계단이다. 올라가 본다. 점점 멀어진다. 힘들다. 좀 쉬어 볼까? 어? 뭐야, 다들 기다려 주지 않고 가네. 정말 치사하게…. 이제 그만 일어서서 가야지, 날 기다려주지 않는 나쁜 애들 따라가려면.

요즘은 쉬는 시간에도 복습하고 점심 시간에도 공부한다. 솔직히 집중이 잘 안된다. 그래도 해 본다. 한동안 잘 돼 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자꾸만 마음이 해이해진다. 무언가에게 마음을 잡아 먹히고 있는 듯하다. "와드득, 와드득, 질겅 질겅, 쾅!" 마음이 먹히고 있다. 갑자기 하기 싫어진다. "안돼, 정신을 차려야 돼!" 다 먹히기 전에 공부를 계속해서 내 마음을 잡아 먹은 괴물을 배터지게 해서 죽이자! 그러면 되려나?


소감 쓰라고 했더니, 최면 상태에서 글을 썼나? 아니면 술을 먹고 썼나? 꼭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사용한 자동 기술법을 보는 기분이었다. 같은 또래의 고등학교 1학년생답지 않게 너무나 솔직한 표현, 그리고 재미있는 비유….

영호의 소감을 읽으며 처음에는 장난 같아서 어이 없기도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번 읽고 세번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얼굴까지 뜨거워지고 있었다.

영호의 글에는 결코 그냥 웃어 넘길 수 없는 요즘 학생들의 고민과 갈등이 있었다. 공부 때문에, 시험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압박감, 초조함, 불안감, 무엇보다도 아픔과 상처가 깊게 깊게 아로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호에게 오늘은 "공부해라"는 말 대신에 "요즘 너무 힘들지?" 그렇게 위로 한마디 건네야겠다.

학교가 소풍처럼, 여행처럼 즐겁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해맑은 웃음을 터뜨리는 우리 반 악동이들
학교가 소풍처럼, 여행처럼 즐겁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해맑은 웃음을 터뜨리는 우리 반 악동이들김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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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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