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둬야지 하다가도 또 사랑하게 되죠"

차 시배지 하동 야생 차밭에서 만난 구월순씨

등록 2004.11.12 16:17수정 2004.11.1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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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꽃망울을 머금었다 달디단 꽃을 피우는 차나무

꽃망울을 머금었다 달디단 꽃을 피우는 차나무 ⓒ 서정일

여행은 참으로 오묘하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전혀 다른 공기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을 갈 때는 물론이며 늘 가던 곳도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걷기 시작하면 모든 게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지난 10월 말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라 할 수 있는 하동을 방문했다. 해가 가기 전에 보고픈 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님은 다름아닌 차(茶). 나는 다음 해를 준비하면서 작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을 차나무가 그리웠다.


재첩국에 동동주 한사발을 들이키고 야생차 군락지인 쌍계사 입구 화개면에 도착했다. 도로 양 옆으로 바위 틈을 비집고 베이지색 꽃을 머금고 앉아 있는 야생차 단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곳이 바로 세계 3대 야생 차밭이라는 화개의 야생 차밭이었다.

물끄러미 차밭을 살펴보니 그저 이름모를 들풀처럼 바위 틈에, 나무 사이에, 잡초들 속에 섞여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빼닮아 강하고 질긴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꿋꿋한 자태였다. 이 차를 없애기 위해 일본인들이 차밭에 불을 질렀지만 그 화마 속에서도 다시 자라났다고 한다.

a 차를 처음 재배한 곳임을 알리는 화개면의 차시배지 탑

차를 처음 재배한 곳임을 알리는 화개면의 차시배지 탑 ⓒ 서정일

우리 나라에서 차가 처음 재배된 게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1300여년 전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이 차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화개동에 심었다고 전해져 이곳을 차 재배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동의 차시배지(茶始培地) 탑 앞에서 대나무에 둘러싸여 덩굴처럼 얽혀 있는 차 한무더기는 조상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내음 같았다. 차가 생육하는 온도 한계는 연평균 12도 정도로 따뜻한 남도만이 품에 안을 수 있는 나무다.

차에 대해 좀 더 알아 보기 위해 어릴 적부터 할머니 품에 안겨 차 만드는 것을 보고 또 마시고 자랐다는 하동 토박이 구월순씨를 만났다. 화개면 운소리 207번지에서 단야식당을 운영하는 구씨는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는 차부터 먼저 준비한다.

a 차나무로 잘 꾸며진 구월순씨의 단야식당 정원

차나무로 잘 꾸며진 구월순씨의 단야식당 정원 ⓒ 서정일

구씨는 대문에서 방으로 들어오는 정원길을 온통 차나무로 꾸며 놓았다. 우리를 맞이한 방은 군데군데 걸려 있는 그림과 사진, 그리고 단아한 찻잔과 피어오르는 차향이 어우러져 멋들어진 풍경을 연출했다. 오십줄에 갓 접어든 구씨의 얼굴은 곱디 고운 차를 닮아 특유의 맑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a 차향이 그윽하게 배어 있는 찻잔

차향이 그윽하게 배어 있는 찻잔 ⓒ 서정일

구씨는 "차는 영물입니다"라는 말로 차와 함께한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 차시배지가 있는 그곳은 어릴 적 구씨의 놀이터였다. 차나무 한 그루의 둘레가 품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대밭에 꽃이 피어 대나무가 모두 죽자 차나무도 함께 베어버렸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도 마음이 몹시 아팠다고.

"할머니께서는 차를 만병통치약쯤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감기나 탈이 나면 돌배, 감 껍질, 인동초 넝쿨 등과 함께 푸욱 고아서 먹이곤 했는데 자고 나면 감쪽같이 나았어요."


옛날 약이 없던 시절에는 그 신비스러운 효능 때문에 차를 약 대용으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a 바위와 어우러져 자라고 있는 야생차

바위와 어우러져 자라고 있는 야생차 ⓒ 서정일

정원에 기르고 있는 차나무는 무엇에 쓰냐고 물으니 야채 샐러드, 튀김, 부침개, 녹차밥 등 음식을 만들면 아주 좋다고 한다. 특히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들 음식에는 차를 꼭 넣는데 탈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씨가 차를 다루는 방식은 그의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 제철에 맞게 신선한 것만 고집하는 구씨의 성격도 할머니를 닮았다. 할머니는 "만드는 사람에 따라 차 맛이 다르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차에는 비단 개인의 솜씨뿐만 아니라 만든 이의 정성과 심성까지도 배여 나온다는 것이다.

"손톱만큼 합니다."

차 수확에 대해 물으니 구씨는 웃으며 말을 꺼냈다. 차밭은 4월 중순부터 보름 동안 수확하는데 하루에 사람 한명이 400~500g 정도의 차를 딴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정말 '손톱만큼' 수확하는 귀하디 귀한 물건이 바로 차였다.

a 은행잎이 소복히 쌓여 있는 행랑채 지붕

은행잎이 소복히 쌓여 있는 행랑채 지붕 ⓒ 서정일

요즘처럼 끝물이 되고 내년 차 농사를 생각할 즈음이 되면 구씨는 "내년엔 절대 차를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단다. 평생 동안 차와 함께 했지만 차를 수확하는 데 들이는 고됨과 정성 때문에 매번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하지만 그게 참 묘해요. 다시 새봄이 되어 찻잎이 움트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면서 마구 설렙니다. 그래서 또 찻잎을 만지고 또 재배하고 그런가 봅니다."

새봄의 설렘처럼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구씨의 차 사랑을 누가 말리겠는가.

a 섬진강 노을에 물든 빨간 단풍

섬진강 노을에 물든 빨간 단풍 ⓒ 서정일

요즘 들어 하동에는 차밭을 일구기 위해 논을 차밭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찻잎이 움트는 봄이 되면 이곳 많은 사람들이 설렘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잘거라고 구씨는 말했다.

구씨의 집을 나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 다시 한번 차시배지를 찾았다. 차 향기를 좀 더 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차꽃 하나를 따서 입에 넣고 씹어 보기도 했다. 달디단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님을 그렇게 가슴에 담고 길에 낙엽이 수북히 쌓인 화개면을 빠져나와 섬진강변을 달렸다. 차에 흠뻑 취해 차 향기를 가슴에 머금고 바라본 섬진강의 노을과 단풍은 더욱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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