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 아니 천지폭포의 위용김형태
나는 개인적으로 간도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곳 백두산에 오면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졌다는 경계비, 곧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꼭 보고 싶었다. 정계비가 없다면 그 흔적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안내책자에 나오는 설명으로 아쉬움을 대신해야 했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워 아는 것처럼, 백두산은 고구려와 발해 때까지는 우리나라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나라의 판도가 한반도로 위축되어 한동안 백두산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1437년(세종 19)에 설치했던 6진(六鎭)으로 백두산과 그 동쪽의 두만강, 서쪽의 압록강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때 두만강 상류의 무산지방(茂山地方)은 미개척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 1674년(현종 15)에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하여 두만강 내 지역 전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단다. 이리하여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압록·두만의 두 강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 원류인 백두산 근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두 강 상류의 북안은 일종의 공백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었단다.
그런데 만주에서도 특히 동부의 백두산 일대 삼림지대는 인삼·모피·진주 등 특산의 보고(寶庫)였으며 지린[吉林]의 영고탑(寧古塔)은 이러한 특산물 집산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에 날로 융성해지던 청나라는 이 지역을 한인(漢人)·몽골인 등 주변 민족의 침범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그 위에 양유를 심어놓았으며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만들어 출입자를 감시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선과의 접경에도 해당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조선인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채취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일이 있었단다. 이러한 월경사건(越境事件)은 자주 발생하자, 청나라는 칙사(勅使)를 보내어 조선의 국왕과 동석하여 죄인을 심리한 일도 3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청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국경을 넘는 월경침입이 자주 있었으며, 때로는 수십 명이 작당하여 우리측의 관원과 군병을 납치한 일도 있었단다.
1677년(숙종 3)에는 청 강희제(康熙帝)가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내대신(內大臣) 무묵납(武默納)에게 명하여 장백산 지방을 답사시키고 다음해에 신하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6년 후에 다시 치제했단다.
1691년 조선의 조정은 청대신 5명이 영고탑을 경유하여 장백산에 가서 그곳을 관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단다. 그 뒤 1710년에는 위원(渭原)의 이만기(李萬技)가 국경을 넘어 삼을 캐며 그 도중에 만주인 5명을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백두산을 귀속하려는 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단다. 따라서 2년 후인 1712년에 청은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국경을 실지 답사시켰는데, 조선은 그 소식을 그해 2월 24일 청 예부(禮部)에게서 통고받았단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에 불응하자는 측도 있었으나, 결국 응하기로 하고 접반사를 임명해 파견했단다. 목극등은 싱징[興京] 방면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따라 올라가 후주(厚州)에서 조선의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 후 혜산진에 이르러 여기서부터 육로를 택했단다. 이때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단다.
그리고 조선접반사군관·차사관(差使官)·통관(通官) 등과 더불어 백두산의 꼭대기에 이르러 그해 5월 15일에 정계비를 세운 후에 무산으로 갔단다. 그리하여 조선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의 일방적 조처로 정계비가 세워졌단다.
따라서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세우기로 했던 정계비를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와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물이 강원(江源)에서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곳의 바위를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세웠단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며 비면에 '대청'이라 행서하고, 그 아래에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比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종서(縱書)하고 청의 필첩식(筆帖式), 조선의 군관·차사관·통관의 성명을 각서(刻書)했단다.
이와 같이 정계비는 청의 일방적 건립이었으므로, 조선 말기에는 청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임의로 유리하게 해석함으로써 경계문제가 양국간의 문제로 재연되어 간도(間島)의 귀속문제에 연결되었다.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하여금 정계비를 조사케 하여, 정계비문 가운데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를 근거로 해서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단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며, 정계비 근처의 물 한 줄기가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토문강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러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없어지고 말았단다.
산삼 사라고 달라붙는 잡상인을 뿌리치고, 숙소에는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온천욕을 하고 가라는 가이드의 권유(대중탕이 2곳인데 중국인이 하는 곳은 시설이 좀 나쁘지만 1000원이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은 시설은 좋지만 1만2000원이라며, 어차피 목욕은 힘들고 온천물에 몸만 담갔다가 나온다며 은근히 중국인 대중탕을 가라고 권유했다)도 물리치고 일행은 온천물에 찐 계란만 사먹고 숙소인 삼강호텔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