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행] 장백폭포, 아니 천지폭포 아래에 서다

천지 아리랑, 아라리오~ 8회 (북경, 백두산, 용정을 중심으로)

등록 2004.11.11 15:09수정 2004.11.1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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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본 장백폭포의 모습.
멀리서 바라본 장백폭포의 모습.김형태
북한 사람들은 백두산까지 어떤 경로를 거쳐 올까?

평양에서 백두산 입구인 삼지연까지 오는 교통편으로는 비행기와 자동차, 그리고 기차가 있단다. 상류층은 비행기 또는 승용차를 이용하고 아무래도 일반 주민들은 기차를 이용한단다. 일단 삼지연까지 오면, 여기서부터 백두역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며, 백두역에서 향도역까지는 케이블카로 10분이 걸린단다. 향도역에서 장군봉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라고 하고.


언제쯤이면 우리 남한 사람들도 중국이 아닌 북한 땅을 통해 겨레의 성산 백두에 오를 수 있을까?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거듭 고대해 본다.

백두산의 야생화 : 바위돌꽃
백두산의 야생화 : 바위돌꽃김재건
천지에서 내려와 장백폭포로 가는 버스 안에서, 현지가이드가 이런 저런 주의사항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내리면 산삼이나 장뇌삼을 사라는 상인들이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버스까지 좇아오니, 아예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우리 일행은 주차장에서 내려 길가의 야생화 등 백두의 주변 경관을 구경하면서 걸어 올라갔다. 버스 종점에서 장백폭포를 지나 천지 물이 흘러나오는 달문까지는 약 2㎞의 거리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단다.

백두산의 야생화 : 비로용담
백두산의 야생화 : 비로용담김재건
가다보니 여기저기 뜨거운 물이 솟는 모습이 보였다. 온천수의 어떤 성분 때문에 그런지는 잘 몰라도 그 주위는 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온천수가 솟구치는 것도 놀랍거니와, 그 온천수가 지하가 아닌 지표밖으로 솟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땅속에 어떤 열기가 있어 이렇게 불처럼 솟구치는가? 혹시 우리 겨레의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염원은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온천장과 온천수에 계란을 쪄 먹는 곳을 지나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도 건너고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천지물이 두 줄기로 쏟아져 내리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장백, 아니 천지폭포의 장관
장백, 아니 천지폭포의 장관김형태
장백폭포였다. '비류직하(飛流直下)'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의 물이 마치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떨어지는 소리 또한 웅장했다. 가이드는 이 폭포소리가 백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초리, 섯돌며 품는 소리 십리의 자자시니 들을 제는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금강산의 만폭동폭포를 보고 노래한 송강의 관동별곡 한 대목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장백폭포의 호연지기를 마음에 담고 싶었다. 정말 폭포수 속으로 한번쯤 안기고 싶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중국 공안원이 막고 있어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한참동안 폭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폭포가 천지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장백은 중국인들이 쓰는 이름(알다시피 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른다.)이니 우리는 장백폭포가 아닌 '천지폭포'라고 부르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물론 백두폭포도 좋겠지만, 백두폭포는 이미 있으니까.

우리 일행은 천지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천지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을 생수병에 담아 마시며 천지의 물을 마셨다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장백, 아니 천지폭포의 위용
장백, 아니 천지폭포의 위용김형태
나는 개인적으로 간도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곳 백두산에 오면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졌다는 경계비, 곧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꼭 보고 싶었다. 정계비가 없다면 그 흔적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안내책자에 나오는 설명으로 아쉬움을 대신해야 했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워 아는 것처럼, 백두산은 고구려와 발해 때까지는 우리나라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나라의 판도가 한반도로 위축되어 한동안 백두산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1437년(세종 19)에 설치했던 6진(六鎭)으로 백두산과 그 동쪽의 두만강, 서쪽의 압록강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때 두만강 상류의 무산지방(茂山地方)은 미개척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 1674년(현종 15)에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하여 두만강 내 지역 전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단다. 이리하여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압록·두만의 두 강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 원류인 백두산 근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두 강 상류의 북안은 일종의 공백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었단다.

그런데 만주에서도 특히 동부의 백두산 일대 삼림지대는 인삼·모피·진주 등 특산의 보고(寶庫)였으며 지린[吉林]의 영고탑(寧古塔)은 이러한 특산물 집산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에 날로 융성해지던 청나라는 이 지역을 한인(漢人)·몽골인 등 주변 민족의 침범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그 위에 양유를 심어놓았으며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만들어 출입자를 감시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선과의 접경에도 해당되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조선인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채취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일이 있었단다. 이러한 월경사건(越境事件)은 자주 발생하자, 청나라는 칙사(勅使)를 보내어 조선의 국왕과 동석하여 죄인을 심리한 일도 3번이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청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국경을 넘는 월경침입이 자주 있었으며, 때로는 수십 명이 작당하여 우리측의 관원과 군병을 납치한 일도 있었단다.

1677년(숙종 3)에는 청 강희제(康熙帝)가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내대신(內大臣) 무묵납(武默納)에게 명하여 장백산 지방을 답사시키고 다음해에 신하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6년 후에 다시 치제했단다.

1691년 조선의 조정은 청대신 5명이 영고탑을 경유하여 장백산에 가서 그곳을 관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단다. 그 뒤 1710년에는 위원(渭原)의 이만기(李萬技)가 국경을 넘어 삼을 캐며 그 도중에 만주인 5명을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백두산을 귀속하려는 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단다. 따라서 2년 후인 1712년에 청은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국경을 실지 답사시켰는데, 조선은 그 소식을 그해 2월 24일 청 예부(禮部)에게서 통고받았단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에 불응하자는 측도 있었으나, 결국 응하기로 하고 접반사를 임명해 파견했단다. 목극등은 싱징[興京] 방면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따라 올라가 후주(厚州)에서 조선의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 후 혜산진에 이르러 여기서부터 육로를 택했단다. 이때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단다.

그리고 조선접반사군관·차사관(差使官)·통관(通官) 등과 더불어 백두산의 꼭대기에 이르러 그해 5월 15일에 정계비를 세운 후에 무산으로 갔단다. 그리하여 조선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의 일방적 조처로 정계비가 세워졌단다.

따라서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세우기로 했던 정계비를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와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물이 강원(江源)에서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곳의 바위를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세웠단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55척, 너비 1.83척이며 비면에 '대청'이라 행서하고, 그 아래에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比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라고 종서(縱書)하고 청의 필첩식(筆帖式), 조선의 군관·차사관·통관의 성명을 각서(刻書)했단다.

이와 같이 정계비는 청의 일방적 건립이었으므로, 조선 말기에는 청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임의로 유리하게 해석함으로써 경계문제가 양국간의 문제로 재연되어 간도(間島)의 귀속문제에 연결되었다.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하여금 정계비를 조사케 하여, 정계비문 가운데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를 근거로 해서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단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며, 정계비 근처의 물 한 줄기가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토문강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러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없어지고 말았단다.

산삼 사라고 달라붙는 잡상인을 뿌리치고, 숙소에는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온천욕을 하고 가라는 가이드의 권유(대중탕이 2곳인데 중국인이 하는 곳은 시설이 좀 나쁘지만 1000원이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은 시설은 좋지만 1만2000원이라며, 어차피 목욕은 힘들고 온천물에 몸만 담갔다가 나온다며 은근히 중국인 대중탕을 가라고 권유했다)도 물리치고 일행은 온천물에 찐 계란만 사먹고 숙소인 삼강호텔에 도착했다.

장백, 아니 천지폭포를 배경으로
장백, 아니 천지폭포를 배경으로김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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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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