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춘당지윤돌
몇 해 전부터 자주 찾는 궁궐, 창경궁! 창경궁은 유별나게 조선의 다섯 궁궐 중 가을을 닮아 있다. 그렇다고 낭만적이거나, 높고 푸른 하늘의 맑음 등의 그럴 듯한 모습과는 다른 이야기다.
크고 아름다운 전각은 그럴 듯하게 남아 있으되, 속모습과 겉모습이 많이도 상처를 입은 궁궐, 많은 전각들은 사라지고 그 흔적인 주춧돌과 터만 아픈 속살을 드러낸 채, 상처를 덮는 거즈(Gauze)처럼 잔디를 덮고 있는 궁궐, 넓은 전각 공간대신 잔디와 뜬금없는 나무들이 차지해버린 궁궐, 그래서 우리는 그 거즈(Gauze)같은 잔디를 게이즈(gaze;응시)해야 하는 궁궐이 바로 창경궁이다.
아름다운 가을 궁궐을 이야기 하려고 하고는 꽤나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기대했던 연인에게 삶의 철학쯤 이야기 해버려 분위기를 망친 꼴이나, 궁궐과 창경궁을 대하는 마음에서 한 번쯤 마른침이 목구멍을 ‘딸꺽’ 타고 건너듯 쉬우나 쉽지 않게 새김질 해보라는 의미에서 짚어본다.
이제부터는 기대했던(?) 가을 창경궁의 이야기를 해보자. 몇 해 전부터 창경궁을 즐겨 찾으면서 항상 가는 곳이 있다. 네 계절, 혹은 다섯 계절 언제 가더라도 좋은 곳이며, 가을에 간다면 서울 어느 곳보다도 가을을 느끼게 해 주는 공간, 단 반 아름의 공간에 온 가을을 담고 표현해 주는 공간이 있다.
그곳은 경춘전 뒤쪽으로 털퍼덕 앉아 뒤쪽 화계와 통명전을 동시에 바라보면, 그 시선과 마음에 낙엽 떨어지듯 사뿐 가을이 내려앉는 공간이다. 거짓같은 겉모습 하나씩 털어 내리며 진실을 드러낸 나무, 그 사이를 오가며 겨울을 준비하는 다람쥐와 청설모, 얼기설기 얽힌 세상에 턱하니 걸려 있는 보름달처럼 나뭇가지를 밝혀주는 까치집, 부담되지 않을 만큼만 쌓여있는 가을의 낙엽, 경춘전 앞공간의 소란은 잦아들어 적당히 시끄러운 잡음들. 굳이 울긋불긋 서너너덧 빛깔의 단풍을 보지 않더라도 가을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신비의 공간, 흡사 우리네 삶의 궤적과 교훈마저 펼쳐 보여주는 다소 건방진 공간이 바로 경춘전 뒤쪽 초라한 반 아름의 공간이다.
꽤나 거창하게 처음부터 어깨에 힘을 주었나? “가보니 별 것 아니던데”라며 나를 탓한다면 좀 더 그 공간을 표현 못해준 내 짧은 글쓰기를 원망하겠다. 다만, 그 공간을 느끼지 못하고서 가을 궁궐을 갔다고 말한다거나 다른 공간에서 가을을 느끼겠다고 자리를 털며 일어선다면 나 또한 당신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경춘전 뒤쪽 공간에서 차고 넘칠 정도의 가을을 받아낸 탄력으로 마저 가을 창경궁을 걸어보자. 사실 그만 보아도 다 본 것이지만 밥을 먹어도 숭늉은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빤히 보이는 통명전을 향해 걸어간다면 그 길은 본래 담이 있던 자리니 월담을 해 가는 꼴이다. 왠지 썩 내키지는 않으나 흔적이 미약해 문이 있던 자리를 찾지 못하겠다.
전각을 가리고 눈길에 거슬리는 안내판 대신 ‘문이 있던 자리’, ‘담이 있던 자리’나 표시해 주면 불청객이나 양상군자 신세는 면해볼 터인데 꽤나 폼을 잡고 가을을 걷는 내 모습이 우스워졌다. 하긴 궁궐에 있어, 지난 역사의 공간에 대하여 나는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통명전 옆 연못에는 밤이고 낮이고, 봄이고 여름이고 함빡 피어 있는 연꽃이 있다. 그 연꽃을 바라보며 향기에 취해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오르는 가을 길은 하루하루 오르는 삶의 계단처럼 흔적이 내려있다. 그 계단을 올라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공간은 유난히 사진을 담는 모습이 많다. 눈치 빠른 분은 아시겠지만, 이쯤에서 사진을 찍으면 괜찮다는 말이다. 통명전 화계 뒤편을 걸을 때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 나무들 사이로 전각들을 굽어보며 걷는 것 또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