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소설] 호랑이 이야기 102

2005년 설날 아침 1

등록 2004.11.15 03:07수정 2004.11.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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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이 왔습니다. 설날은 축복된 날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설날이 오면 축복을 받은 것처럼 느끼기 마련입니다. 설날엔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이 새로운 기운을 얻는 날인 것 같습니다. 그 새로운 기운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쨋든 그 새로운 기운과 힘을 받은 사람들은 새해을 맞이하면서 분주히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바리가 눈을 떴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동안 한번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눈을 뜬 기분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깊은 잠에 들었다가 깬 것처럼 말입니다. 졸린 눈을 부비며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어제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바리의 여섯 번째 생일날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엄마 아빠와 셋이서 찍은 사진이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바리를 반기고 있었고, 돌아가시기 전 외할머니와 식물원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는 어린 바리가 눈을 찡긋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을 하고 이렇게 잠을 험하게 잔거지?‘

바리는 생각하며 윗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습니다.

여덟 시였습니다. 다행히 늦잠을 자지는 않았습니다. 바리는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밤새 눈이 내려서 온 세상이 환했지만, 그 하얀 세상을 밝히고 있는 밝은 햇살도 마치 어제는 떠오르지 않았던 것처럼 무척 반갑기까지 했습니다. 아래로는 눈 속에서도 푸르른 침엽수들이 무성하게 모여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얼어붙은 한강이 보였습니다.

아파트 아래로는 설 준비에 바쁜 사람들이 보입니다. 손님맞이로 이웃들이 분주합니다.

바리는 팔을 활짝 펴고는 그 햇살을 가슴으로 들이마셨습니다. 모든 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매일 보는 하늘과 햇살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를 보는 느낌입니다.

바리는 좀 어색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피식 웃어넘겨 버렸습니다.

설날인데…..

바리가 13살이 되는 행복한 설날입니다.

바리는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고 거실로 내려갔습니다.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엄마!”

바리는 엄마를 목청껏 부르며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떡국을 끓이시던 엄마는 그런 바리가 하는 짓에 적잖에 놀라신 듯 바리의 팔을 풀어내리며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래, 바리야, 엄마 처음 봤니? 하마터면 국물에 손 델 뻔 했잖아. 국물맛 보고 있었는데, 너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일어나면 어떡해, 손님들이 오시는데, 얼른 세수하고 한복도 갈아입어야지”

바리는 엄마가 하는 말엔 아랑곳 않고 젖먹이 아기돼지처럼 엄마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말했습니다.

“몰라요. 오늘은 그냥 엄마가 너무 좋아요. 엄마를 너무 사랑해. 갑자기 그냥 엄마가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

어머니께서는 바리가 하는 말이 싫지 않은 듯 머리를 가만히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 내가 제일 사랑하는 아빠!”

바리는 한복을 차려입고 들어오시는 아버지께서 신발을 벗으시기도 전에 얼른 달려가 아버지를 끌어안았습니다. 아버지도 바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자 사뭇 놀라신 듯 합니다.

“아니, 바리야. 왜 그래, 무슨 전쟁터 갔다가 돌아온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빠를 반갑게 껴안니?”

어머니가 다시 떡국이 끓고 있는 냄비를 열고 말씀 하셨습니다.

“몰라요, 우리 딸아이가 13살이 되더니 갑자기 철이 들었나봐요.”

바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습니다.

“오늘은 그냥 아빠랑 엄마가 너무 좋아요. 전부 너무 너무 사랑해요, 그거 알죠? 바리가 엄마 아빠를 너무 너무 사랑하는거,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면 저기 하늘나라 끝자락에라도 갔다올 수 있어요."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바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구, 하늘나라 끝자락까지는 갔다올 필요 없고 저 아래 내려가서 손님들이나 좀 모시고 올라오렴.”

“벌써 도착하셨어요?”

아닌게 아니라 대문 뒤로는 큼지막한 상자 몇 개가 놓여있었습니다.

손님들이 가지고 온 짐을 먼저 가지고 올라오신 것입니다.

바리는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미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고모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문을 들어서고 계셨습니다. 이모와 이모부는 바리를 보고는 해바리기가 된듯 커다른 웃음을 만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에유, 우리 바리, 많이 컸구나.”

“이제 아가씨 소리를 들어도 되겠구나, 아이구, 녀석.”

고모님이 하얀 가방 하나를 손에 들고는 바리를 안아주셨습니다.

“바리,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바리.”

바리는 고모의 오른뺨에 살짝 뽀뽀를 하고는 물었습니다.

“고모. 이게 뭐에요? 선물이에요?”

고모님은 그냥 미소를 흘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밀이다, 이따가 풀어보자.”

손님들이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오자 동생 혜리도 손님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를 듣고는 달려나왔습니다.

“이모, 이모부, 고모.”

혜리는 전부에게 달려가 일일이 뽀뽀를 해주면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마치 건전지를 넣으면 뽀뽀를 열심히 해주는 인형 같아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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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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