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부'가 사립학교 이사장이 된다면?

사립학교법 개정을 촉구하는 리본을 가슴에 단 이유

등록 2004.11.15 07:48수정 2004.11.1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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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놀부 심보네!"

'사립학교법이 개정되면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입니다.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 국민들을 겁박하고 죄 없는 학생들을 볼모로 삼으려는 저들의 고약한 심보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흥부를 내쫓고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부러뜨린 놀부의 심보가 너무도 닮은꼴이어서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영어 재량시간을 이용하여 전래민담인 '흥부와 놀부'를 소재로 극화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들이 흥부보다는 놀부라는 인물에 더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착한 흥부 역은 인기가 없고 반면에 심술궂은 놀부 역을 맡으려는 아이들이 많아 애를 먹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진심을 알고 싶어 이렇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흥부가 좋아요? 놀부가 좋아요?"
"놀부가 좋아요."
"왜요?"
"흥부는 무능하고 멍청해서 싫어요."
"그럼 놀부는 문제가 없나요?"
"놀부는 심술궂긴 해도 제 식구를 굶기지는 않잖아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흥부는 제비를 아끼는 순수한 마음으로 제비다리를 고쳐주었고, 놀부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렸는데 만약 여러분이 제비의 입장이라면 흥부가 좋겠어요, 아니면 놀부가 좋겠어요?"
"당연히 흥부가 좋지요."

이번에도 아이들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아주 명쾌했습니다. 저는 뭔가 이야기가 되겠다 싶어 흥미를 가지고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여러분 아빠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이 흥부 같은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놀부처럼 심보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흥부 같은 사람이 좋지요."
"왜죠?"
"아, 그거야 놀부 같은 사장 만나면 일만 시키고 월급도 떼먹으려 할 거고…."

그리고는 뭐라 뒷말을 이으려다가 말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 아이 대신 제가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빠가 월급을 못 받으면 집안 살림이 어려워질 거고, 그러다 보면 학교도 못 다닐 수도 있고… 맞니?"
"예? 예."
"하지만 흥부 같은 착한 사장님은 만나면 상황이 달라지겠지. 열심히 일한 만큼 월급도 꼬박꼬박 잘 주고, 그러면 집안 살림도 피고 넌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고. 그렇지?"
"예."
"그런데 왜 흥부를 싫어하고 놀부를 좋아하지?"
"예? 그건… 그러니까…."

저는 그 날 아이들에게 한 사람의 착함이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실제의 삶 속에서 남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과 삶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아픔인지에 대해서도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말미에는 이런 말도 해주었습니다.


"물론 흥부에게도 잘못이 있어요. 가난한 살림에 대책 없이 자식을 너무 많이 낳은 것도 그렇지요. 하지만 그런 거야 피임이라든지 가족계획이라든지 하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큰 잘못이라고 하긴 어려워요. 오히려 흥부의 가장 큰 잘못은 너무 착하기만 한 나머지 자기의 정당한 몫을 챙길 줄 몰랐던 바로 그것이었어요. 아마 여러분이 흥부를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이겠지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제 말에 수긍의 눈빛을 보내온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한 아이가 갑자기 제 가슴에 차고 있던 리본을 가리키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그 리본은 왜 차고 다니는 겁니까?"

사립학교법 개정을 촉구하는 뜻에서 차고 다니는 리본의 착용 이유야 아주 간단했습니다. 하지만 배움의 길에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해줄 것인지 그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잠시 허공에 두었다가 이내 입을 열었습니다.

"세상에는 흥부나 놀부처럼 착하기만 하든지 나쁘기만 하든지 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하고 악한 마음이 조금씩은 다 섞여 있지요. 그래서 사람은 늘 조심해야하는데 아무리 착한 사람도 막강한 권력이 주어지거나 자기를 견제하는 장치가 없으면 쉽게 부패하고 말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학교 경영자가 되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도록 사립학교법을 개정해서 교육을 제대로 하자는 뜻에서 리본을 차고 다니는 거예요. 운명에 순응하는 착하기만 한 흥부가 아니라 이제는 정당한 자기주장도 할 줄 알고 사랑하는 제자들도 보호할 줄 아는 똑똑한 흥부가 되고 싶어서 이렇게 가슴에 당당히 리본을 달았고요. 이해가 되었나요?"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그 정도만 얘기를 해주어도 다 알아듣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맑은 표정을 보자 저는 우리 아이들이 참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최고 명문 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100분씩이나 열띤 토론을 하고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에 대한 문제를 설명한 지 불과 5분이 채 안되어 명쾌하게 이해를 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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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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