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스털링 명예교수 로버트 달의 저서 '미국헌법과 민주주의' 한국어판.
첫번째 결함은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상호견제에 의한 갈등으로 인해 정치와 정부 기능이 교착과 마비상태로 빠지는 것이요, 두번째 결함은 사법 기능의 역할, 특히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엄청나게 비대해졌다는 점이다. 이는 "권리중의 권리"라는 국민참여 배제와 논의 과정의 부재라는 현상이 '문화적 전통'처럼 반복돼 온 탓이라고 최 교수는 진단했다.
최 교수가 지적한 이 두가지 치명적인 결함은 결국 정부의 무능력을 심화시킴과 동시에 정치의 탈정치화를 가속화시켰고, 국가보안법이나 탄핵, 신행정수도 건설에 대한 헌재의 판결처럼 정치적 결정을 낳는 사례를 증가시켜 민주주의가 제약을 받는 불행한 사태를 불러왔다. 후자는 곧 '제왕적 사법부'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특정 정당이 쟁점이 되고 있는 법안에 대해 입버릇처럼 위헌소송을 제기하며 입법권을 '자진 박탈'하는 2004년 한국정치의 현실을 겨냥하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최 교수는 '제왕적' 헌재의 최근 결정내용을 "민주주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후견주의의 표현"이라는 로버트 달의 개념에 원용해 논평할 정도로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평가를 위해 그의 지적 잣대는 지난 5월의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 및 10월 신행정수도특별법의 위헌 결정 등 두 사례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 5월 탄핵 기각 당시 중앙선관위가 대통령을 공무원법 9조가 정의하는 공무원으로 해석하고 헌재가 이를 인정하는 것은 "대통령직을 공무원의 역할로 한정시키는 동시에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광범한 정치적 역할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이라고 최 교수는 말한다. 이는 곧바로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전 과정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정면 비판으로 이어졌다.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은 '사법부에 의한 정치적 결정의 대표적 사례'
지난 10월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에 대해서 마찬가지였다. 최 교수는 헌재의 이 위헌 결정을 "사법부에 의한 정치적 결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규정했다. 나아가 "민의의 대표기구가 내린 다수의 결정을 번복한 것으로, 헌재 결정의 비민주성과 입법부에 대한 사법부의 우위를 입장하는 사례"라고도 했다.
최 교수는 "여야가 압도적 다수로 동의한 정치적 결정과정을 거쳤고 이에 앞서 대선 과정에서 유권자의 직접투표에 의해 합법적으로 위임된 사안임에도 헌재가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은 민주주의의 규범과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헌재의 위헌 결정을 '비민주적'이라고 단정했다. 이는 "탄핵기각 칭송했던 대통령이 이제 와서 헌재를 비난하느냐"고 열을 올렸던 보수적 정치엘리트들의 비아냥거림 섞인 해석과는 차원이 다른 주장이다.
그렇다고 최 교수가 항상성·헌정주의·보수파로 표징되는 매디슨적 민주주의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매디슨적 민주주의도 충분하지 않고 민중적 민주주의만으로도 되지 않으며 민주주의는 두 가지 이념형의 동태적 균형(dynamic equilibrium) 위에서 존립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의해 양자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지는 상태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말이다.
헌법이라는 '수단'이 민주주의라는 '목적'에 우선해서는 안돼
이같은 그의 민주주의관, 정치관이 한국정치에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헌법이라는 '수단'(헌정주의 혹은 매디슨적 민주주의)을 민주주의(민중적 민주주의)라는 '목적'에 앞세우지 말고 두 모순적 요소의 균형적 결합을 취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두가지 이념형의 동태적 균형점이 발견될 수 있다는 뜻이다.
21세기 한국이 처한 현실처럼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작동이 멈춰버린 '좋은 정치'의 복원은 필수적이라고 최 교수는 누차 강조한다. 좋은 정치의 복원은 헌법이라는 제도 자체에 신앙적 믿음을 보내는 보수세력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빈약한 이해로 구호만 외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개혁세력의 각성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번역서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에 담긴 최 교수의 장문의 서문 '민주주의와 헌정주의 : 미국과 한국'은 "헌법재판소를 누가 감독할 것이냐"라는 유의미한 질문에서부터 "우리 헌법은 과연 민주주의적인가?"라는 '파괴적' 질문까지 우리 스스로 학습해 파헤쳐 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은 민주주의의 제3세계로 퇴락하고 있는 미국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선진민주주의 국가로 도약할 것이냐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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