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맨드라미 꽃씨를 받으며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03>무룡장군의 슬픈 전설 간직

등록 2004.11.15 15:12수정 2004.11.1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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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장군의 슬픈 전설이 깃든 맨드라미
무룡장군의 슬픈 전설이 깃든 맨드라미이종찬
대암산(667m, 창원시 사파동)으로 가는 길목,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진 과수원집 들머리에는 빨강 노랑빛의 닭벼슬을 치켜든 맨드라미꽃이 까만 씨앗을 톡톡 터뜨리고 있다. 마치 떠나가는 늦가을을 붙잡고 조금만 더 머물다가 가라고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하다. 이대로 떠나면 일년을 또 어떻게 기다릴 수 있느냐고.


맨드라미는 꽃 모양이 마치 수탉의 벼슬처럼 생겼다 하여 '계관화'(鷄冠花) 혹은 닭 머리 모양의 꽃이라 하여 '계두화'(鷄頭花)라고도 불린다. 맨드라미는 예로부터 떡을 찔 때 같이 넣어 꽃물을 곱게 물들이기도 하고, 말린 꽃을 물에 달여 토혈이나 설사, 변비, 여성의 월경 불순 등에 약으로 이용하기도 한 소중한 꽃이다.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마을 곳곳에도 맨드라미가 참 많았다. 그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맨드라미를 흙담 아래 줄줄이 심거나 장독대 옆에 주로 심었다. 아마도 방패 모양을 한 맨드라미의 꼬부라진 붉은 빛깔이 집안이나 장독대 주변으로 들어오는 각종 잡귀를 막아 준다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부챗살처럼 펼쳐진 붉은 몸통에 꼬부라진 붉은 댕기를 매단 맨드라미에는 충신 무룡 장군에 얽힌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전쟁터에 나갔던 무룡 장군이 큰 승리를 하고 돌아오자 왕은 무룡 장군을 몹시 총애했다. 그러자 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왕과 장군 사이를 교묘하게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은 간신배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의 말에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수탉의 벼슬을 닮았다 하여 '계관화'(鷄冠花)라고도 불리는 맨드라미
수탉의 벼슬을 닮았다 하여 '계관화'(鷄冠花)라고도 불리는 맨드라미이종찬
입이 단 간신배들은 마침내 무룡 장군이 역모를 꾀한다는 말까지 왕에게 서슴없이 내뱉는다. 이에 너무도 놀란 왕은 급기야 무룡 장군을 처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만다. 아무 것도 모르고 왕에게 불려 나간 무룡 장군은 무사들이 자신을 둘러싸자 신변에 위험이 닥친 것을 깨치고 달아나려 한다.


30여명의 힘 센 무사들과 싸우던 무룡 장군은 결국 죽음의 고비에 이르게 된다. 그때 간신배들은 '무능한 자를 장군으로 믿는 왕 또한 무능하다'며 왕까지 죽이려 한다. 그러자 죽어가던 무룡 장군이 겨우 일어나 남은 힘을 다해 간신배들을 모조리 잡아 죽인 뒤 끝내 자신도 죽고 만다.

왕은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하면서 무룡 장군을 크게 장사 지낸다. 이듬해 무룡 장군의 무덤에서 방패처럼 두툼하고 튼튼하게 생긴 꽃이 피어난다. 그 꽃이 바로 수탉의 벼슬을 닮았다는 맨드라미꽃이다. 죽어서도 왕의 방패가 되겠다는 무룡 장군의 충심! 그 충심을 어찌하랴.


"니 퍼뜩 가서 담부랑(흙담) 밑에 있는 맨드라미꽃하고 이파리 좀 따온나. 벌레 먹은 이파리 말고 이쁘게 물든 거로 골라서 따온나."
"와예?"
"꽃은 잘 말리가(말려 가지고) 너거들 배 아플 때 묵고, 이파리는 문종이 바를 때 문살 사이로 넣으모 울매나(얼마나) 이뿌다꼬."
"그라모 올 도배할 낍니꺼?"
"그걸 말이라꼬 하나."


해마다 이맘 때, 도랑가 둑에 전봇대처럼 쭉쭉 뻗은 미루나무에서 노오란 잎사귀가 툭툭 떨어지는 11월 중순 무렵이면 어머니께서는 상남시장에 나가 벽지와 문종이를 사 오셨다. 곳곳에 얼룩이 진 때묻은 벽지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숭 뚫린 방문의 문종이를 떼내고 새롭게 바르기 위해서였다.

집 들머리에 줄줄이 선 맨드라미를 바라보면 금세 어릴 적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집 들머리에 줄줄이 선 맨드라미를 바라보면 금세 어릴 적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이종찬
어머니께서는 그때마다 내게 흙담 아래 예쁘게 피어 있는 맨드라미꽃과 붉은 줄무늬가 곱게 뻗은 맨드라미 잎사귀를 따오게 했다. 그리고 수탉 벼슬처럼 꼬불꼬불하게 얽힌 빨간 맨드라미꽃은 장독대 위에 말렸고, 마악 붉은 물이 드는 단풍잎처럼 고운 맨드라미 잎사귀는 문고리 옆 문살 사이에 끼우고 문종이를 한번 더 발랐다.

대나무 무늬가 촘촘촘 박힌 하얀 문종이 사이에 낀 맨드라미 잎사귀, 하얀 문종이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붉으죽죽한 빛의 파아란 맨드라미 잎사귀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방문 가운데 끼운 네모 진 작은 유리 사이로 비치는 황토마당과 맨드라미 잎사귀는 참 잘 어울렸다.

"근데 맨드라미꽃은 뭐 할라꼬 말립니꺼? 씨앗은 그냥 받아도 되는데…."
"너거들이 갑자기 설사병을 만나거나 똥꼬가 아프다꼬 할 때 급히 쓸라꼬 그란다 아이가. 혹시라도 땡겨울 밤에 너거들이 아프다꼬 데굴데굴 구르고 있으모 우짤끼고."
"미리 그런 약을 쪼매 사 놓으모 될 꺼 아입니꺼."
"그런 여유돈이 있으모 부자구로(부자이게)."


그 당시 어머니께서는 맨드라미꽃뿐만 아니라 산과 들에 널린 여러 가지 꽃과 열매 따위를 따서 가을 햇살에 잘 말려 누우런 삼베에 꼭꼭 싸서 장롱 위에 올려 두었다. 그래서 그런지 해마다 이맘 때쯤 큰 방에 들어가면 어디선가 한약 비슷한 내음이 솔솔 풍겨오곤 했다.

"아나!"
"이기 뭐꼬? 잔디 씨가?"
"문디 가시나! 니 눈에는 그기 잔디 씨로 보이나?"
"그라모 새까만 이기 도대체 뭐꼬?"
"맨드라미 씨 아이가. 내년 봄에 너거(너희) 집 우물가에도 그 씨로 좀 심어라. 맨날 내 보고 맨드라미꽃 좀 꺾어 달라꼬 하지 말고."
"문디 머스마! 니 그라는(그러는) 거 보이(보니까) 인자 내가 싫어지는 갑지?(싫은 모양이지)"
"그…그기 아니다."


한방과 민간에서는 맨드라미꽃을 말려 물을 붓고 달여 변비, 설사, 토혈 등에 썼다고  한다
한방과 민간에서는 맨드라미꽃을 말려 물을 붓고 달여 변비, 설사, 토혈 등에 썼다고 한다이종찬
이듬해 봄,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살았던 그 가시나네 집 우물가에도 맨드라미가 줄지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근데,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어도 그 가시나네 집에서는 이상하게 맨드라미꽃이 피어나지 않고 잎사귀만 무성했다. 아니, 꽃이 달리긴 달렸는데 그 가시나 손톱만한 아주 작은 꽃이 달렸다.

그때부터 그 가시나는 나와 마주치기만 하면 입만 삐쭘히 내민 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나는 속이 탔다. 하루는 우리집 장독대 옆에 피어난 예쁜 맨드라미꽃을 몇 송이나 꺾어든 채 탱자나무 울타리 안을 기웃거렸다. 그때 그 가시나는 우물가에 앉아 잎만 무성한 맨드라미를 희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나!"
"싫타!"
"아나!"
"싫타카이!"
"문디 가시나! 그라이 만다꼬(왜) 씰데없이(쓸데없이) 비료로 그리 많이 주노? 비료로 많이 준다꼬 꽃이 더 예쁘게 피어날 줄 알았더나?"
"……."


그날 그 가시나는 내가 건네 주는 맨드라미꽃을 바라보며 훌쩍훌쩍 울었다. 그 가시나가 맨드라미꽃을 들고 어깨를 들썩일 때마다 맨드라미꽃의 까만 씨알이 몇 개씩 투둑투둑 떨어졌다. 내가 "와 우노?"라고 묻자 그제서야 그 가시나가 그 예쁜 볼우물을 지으며 "내가 밉어서(미워서)"라며 샐쭉 웃었다.

어머니께서는 맨드라미 잎사귀를 따서 문살 사이에 예쁘게  끼우곤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맨드라미 잎사귀를 따서 문살 사이에 예쁘게 끼우곤 하셨다이종찬
그래. 나는 빠알간 맨드라미꽃만 바라보면 우물가에 앉아 맨드라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던 그 가시나가 생각난다. 그리고 내가 건네 준 그 빠알간 맨드라미꽃을 머리에 꽂으며 눈웃음 툭툭 던지던 그 가시나의 우물 속처럼 깊숙한 눈동자가 자꾸만 어른거린다. 지금쯤 그 가시나도 나처럼 까아만 맨드라미 꽃씨를 받으며 나를 떠올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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