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녁앞에 서면 모든 근심이 사라져요

죽도봉 공원위 환선정에서 생활하는 박희숙씨

등록 2004.11.17 23:35수정 2004.11.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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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씨의 일터인 과녁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박씨의 일터인 과녁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 서정일

전남 순천시 중심가에 죽도봉 공원이 있다. 나지막한 언덕에 숲으로 둘러싸여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아늑한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에 심신을 수양할 수 있는 환선정이라는 활 쏘는 누각이 있다.


매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순천 인근지역에 사는 약 50여명의 회원들이 모여 자웅을 겨루고 심신을 수양하는 활터로써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곳이다. 옛부터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선비들의 몫이라 했다. 여성의 출입이 엄격하다는 얘기. 그런데 이곳에 이상스레 홍일점이 한명 있다.

a 노란깃발로 화살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신호를 보내게 된다.

노란깃발로 화살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신호를 보내게 된다. ⓒ 서정일

30대 후반의 박희숙씨.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엔 생소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름 아닌 과녁 앞에서 궁사들의 화살 방향과 명중여부를 노란 깃발로 판가름 해 주는 환선정에 없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이다. 순천에 활 쏘는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니 박씨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순천에선 두 사람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씨가 약 1년 전부터 이 일을 시작한 것은 건강 때문.

숲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발아래 순천시내를 내려 보고 앉아 있기만 해도 저절로 건강이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반경 10여미터의 과녁판 앞을 매일 걸어 다니면서 화살을 줍기 위해 앉았다 일어서다를 반복하니 이 보다 더 좋은 운동이 어디 있느냐는 박씨. 활 쏘는 것은 정신건강에도 좋으니 박씨에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하지만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가정사 등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평탄하지 않았던 생활 등 말 못할 사연들이 많은지 머뭇거리길 한참,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면서 다시 과녁 앞으로 나선다.

a 매 경기가 끝날때 마다 흩어진 화살을 주워모은다

매 경기가 끝날때 마다 흩어진 화살을 주워모은다 ⓒ 서정일

원의 중심인 홍심을 맞출 경우 노란깃발로 세 번 원을 그리며 그저 과녁만을 맞출 경우 허공에 두 번 원을 그린다. 그리고 화살방향에 따라 오른쪽, 왼쪽, 위쪽 표시를 깃발로 해 준다. 경기가 다 끝나면 흩어진 화살들을 주워 모아 오가는 카트에 실어주는데 보기엔 쉬워도 처음엔 팔과 다리에 마비가 올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운동 삼아 즐긴다고 한다.


3시간 정도 그러길 반복하더니 드디어 시합이 끝이 났다. 박씨에게 오늘의 일과가 다 끝난 것이다. 정리까진 마친 상태. 하지만 그녀는 퇴근하려는 기색이 없다. 그녀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환선정 옆에 있는 자그마한 집. 그녀의 일곱 평 남짓한 집인 것이다.

a 박씨가 홀로 기거하고 있는 환선정옆 자그마한 집

박씨가 홀로 기거하고 있는 환선정옆 자그마한 집 ⓒ 서정일

성악 전공에 음악학원까지 운영했던 박씨, 어머니 합창단의 지휘자로 꽤 알려졌고 결혼까지 했던 그녀가 이곳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한사코 건강상의 이유라고만 말하는 그녀, 무슨 사연이 있음이 틀림없었지만 그동안의 버거웠을 삶을 상기하게 될까 걱정되어 질문을 그만두었다.


"이곳에서 밤에 야경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 정말 환상적입니다" 라고 말하며 화제를 돌려보지만 박씨에게서 느껴지는 건 진한 외로움. 늘 곁에 끼고 산다는 하프와 애지중지하는 고양이만이 그런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다. 취재를 마치고 되돌아오는 길, 환선정의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며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박씨가 하루 빨리 마음의 건강을 되찾고 웃는 얼굴로 지인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
a 그녀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건 항상 곁에 있는 하프

그녀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건 항상 곁에 있는 하프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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