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째 일년에 한번 도쿄에 가는 이유?

나의 짧은 도쿄 여행기

등록 2004.11.18 16:42수정 2004.11.1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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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을에 약 일주일간의 휴가를 갖는다. 그때를 위해서 일년 동안 적금을 들거나 따로 돈을 모은다. 약 2백만원, 적지 않은 금액이다. 최근에는 2001년부터 4년 동안 해마다 도쿄를 다녀왔다. 올해의 경우 11월 초에 약 8일간의 여행이었다. 온천을 가거나 자연을 즐기는 것도 좋을 텐데, 왜 하필이면 사람이 많아 복잡하고 물가도 비싼 도쿄를 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는 최근 4년 동안 그곳에 간 이유가 있다.

평소 나는 각종의 음악 또는 오디오 저널을 꼼꼼히 본다. 거기서 각각의 전문가들이 적어 놓은 의견을 읽되 다 믿지는 않는다. 다만 참고할 뿐이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통해서 새로운 음악 CD 또는 LP를 구입한다.


도쿄에 가면 제일 처음 들리는 곳은?

혹 구입하지 못할 경우에는 작은 수첩에 적어 놓는다. 배낭여행을 떠날 때, 음악 다음으로 내가 가장 아끼는 라이카 M6 카메라와 함께 배낭 맨 위에는 언제나 그 수첩이 들어 있다. 요즘에는 세상 어느 곳을 돌아 봐도 디카(디지털 카메라)의 세상이다. 그러나 나는 디카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용법도 모른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구입할 생각도 없다.

평소에 닳도록 적어 놓았던 음악 수첩, 그것은 바흐가 작곡한 '음악 노트'보다 소중하다. 내 머리는 상당히 나빠서 그것 없이는 아무리 큰 레코드숍을 간다 해도 옥석을 가릴 재주가 없다.

먼저 들리는 장소는 도쿄에서 가장 큰 시부야의 H.M.V. 그곳은 1층부터 6층까지 음악 자료로 가득 채워져 있다. HMV라는 이름은 He's Master's Voice(그의 주인의 목소리)의 줄임말이다.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유성기 앞을 떠나지 않고 앉아 있는 바둑이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HMV는 영국 런던에 본사가 있는 다국적 기업이다. 시부야의 숍에 있는 음반들은 아마 이삼십만장은 족히 될 것이다. 한국에는 그런 곳이 없다. 경제 규모가 지금보다 더 커져야 하고 음악 애호가도 더 늘어야 가능할 것이다.

a 비엔나 스탓츠 오퍼 라이브 음반들은 대개 우수한 녹음들이 많다(좌). 카운트 베이시 100주년 기념 음반(우).

비엔나 스탓츠 오퍼 라이브 음반들은 대개 우수한 녹음들이 많다(좌). 카운트 베이시 100주년 기념 음반(우).

HMV 5층과 6층의 클래식과 재즈 코너는 나에게 보물창고와 같다. 거기서 열장 혹은 스무장의 음반을 산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면 아예 수첩을 건네 주면서 "찾아 달라. 나는 이곳에 일년에 한번 오기 어려운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내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 해도 그들은 열심히 음반을 찾아 준다. 그동안 나는 다리가 아파도 참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참는다. 반평발의 발바닥은 뜨겁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른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도 원하던 음악을 모두 고를 때까지는 참는다.


그곳에서 나와 도로변 공공 재털이가 있는 곳에서 담배를 한개비쯤 피운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보기 좋지 않다. 요즘은 도쿄에서도 흡연자는 대우 받지 못한다. 조용하고 깨끗한 곳에서 연기를 내뿜는 재미를 즐기려면 경제적인 여유가 더 필요할 것이다.

한숨 돌린 다음에는 도큐 핸즈로!


근처의 체인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고 잠시 쉰다. 시부야에 가면 반드시 한번쯤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도큐핸즈(Tokyu Hands). 각종의 생활용품이 약 17만가지쯤 있는 곳이다. 나무, 의자, 소파, 자건거, 그림, 사진, 열쇠, 천, 소형 와인 냉장고 등 구경만 하는 데도, 왠만한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든다.

거기서 나는 가구의 흠집을 가리는 데 사용하는 크레용을 하나 사고, 내가 좋아하는 재즈 색소폰 연주자 ‘덱스터 고든’의 액자용 사진을 하나 산다. “집에 가자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살 것 다 샀으므로”가 이유다.

신주쿠의 가부키초 근처 노숙자들이 잠드는 작은 광장 옆, 도시 한복판이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값싼 여관에 들어가 잠든다. 작년 10월, 내가 그곳에 갔을 때만 해도 신주쿠에는 버진(Virgin) 레코드숍이 있었다. 파리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곳이 ‘버진’이었는데, '메가 스토어(대형판매장)'라는 말을 간판에 적어 놓을 정도로 HMV와 견줄 만한 음악 백화점이다. 지하 1층에서부터 6층까지 빼곡히 음악과 영상 자료들이 가득차 있는 건물, 그런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빨간색 바탕에 흰 글씨로 'Virgin'이라고 적혀 있는 커다란 건물이 은회색의 평범한 오피스 빌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a 음반 가게 디스크 유니온.

음반 가게 디스크 유니온. ⓒ 나의승

근처에 있는 디스크 유니온(Disc Union)이라는, 10평이 넘지 않는 레코드 숍에 가서 물어 본다. “버진 레코드 어디 갔나요?” “몰라.” 단지 그 대답뿐이었다.

서울의 연세로 독수리다방 맞은편에 있는 향레코드를 생각나게 하는 사이즈의 디스크 유니온은 신주쿠에 약 두블럭의 면적에 바닥 면적이 열평이 넘지 않는 음반 매장을 다섯개 정도 갖고 있다. 다섯개의 각 매장은 물론 서로 도보권 안에 있으며, 장르별로 전문화되어 있다. 블루스, 재즈, 팝&록, 아날로그 LP, 기념품&음악 관련 사진, 클래식 등으로 나뉜 작은 레코드숍들은 ‘타워’ ‘버진’같은 공룡회사와의 경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신주쿠‘버진’은 경쟁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 면에서 생각할 때, 도쿄에 ‘디스크 유니온’의 존재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다국적 기업의 거대 자본 커피숍 맞은편에 여전히 좋은 커피 맛으로 단골 고객들을 맞고 있는 동네 커피숍들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리타 공항에서부터 도쿄 시내에 이르기까지 소규모 커피 전문점의 맛을 더 선호한다. 최고의 커피 기계를 사용하지만 아르바이트 학생이 내리는 커피는 맛이 좋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10년 혹은 20년의 외길 바리스타(커피 전문가)가 운영하는 곳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만약 당신이 도쿄의 도심을 걷다가 다리 아프고 피곤할 때 그런 장소에서 에스프레소 커피에 설탕을 반스푼 정도 넣고 휘휘 저어서 한두모금 한다면, 눈이 살짜기 뜨이면서 상체를 의자에 기대고 “으음” “허어”등의 공감의 느낌을 담은 소리를 절로 내게 될 것이다.

이곳은 하야오 천국, 지브리 박물관

a 주륜장(자전거 전용 주차장) 지블리 박물관에는 자동차 주차장은 없는 것 같다

주륜장(자전거 전용 주차장) 지블리 박물관에는 자동차 주차장은 없는 것 같다 ⓒ 나의승

장소와 이야기를 바꿔서 <미래소년 코난> <루팡 3세> <이웃집 토토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성 라퓨타>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마녀 우편배달부> <붉은 돼지> 등을 만든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블리 박물관은 그들 문화의 보석이다. 신주쿠의 추오센(중앙선)역에서 아홉 정거장을 가면 미타카역이 나온다. 미타카역의 남쪽 출구를 나와서 약 십오분 정도 걸어가면 공원 한쪽에 들어 앉아 있는 지브리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는 하야오의 작업실과 그가 만들어 온 애니메이션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게다가 미발표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도 감상할 수 있다. 그곳에 가면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나고, 그의 생각과 철학을 만나고, 그의 친구들을 만난다. 주차장은 없다. 아마도 하야오의 생각이지 않았을까.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주세요”라는….

a 고양이 버스

고양이 버스 ⓒ 나의승

<토토로>에 나왔던 고양이 버스를 올라타거나 들락거리며 웃는 아이들의 표정은 무작정 상기되어 있었다. 그곳 지블리 박물관은 “영화는 빛과 그림자의 환상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돌아가는 나비와 새들의 파노라마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 로봇의 모습을 볼 때 내 마음의 한조각을 보는 듯 아련한 연민이 느껴진다.

그 공간을 흐르는 음악은 오래 전 극장에서 사용되었을 법한 3극관 방식의 진공관 앰프에서 증폭된다. 어둡지만 가까이서 봤더니 '시카고, 알택Altec'이라고 적혀 있다. 어린이들의 청력을 고려해서일까, 자극적인 소리는 없다. 자연스러운 소리다. 60명 혹은 70명이 들어가면 가득채워지는 작은 극장은 작지만 럭셔리하다.

“영화 상영하겠습니다”라고 안내하는 사람이 상냥하게 말하면, 불이 꺼지고 작은 창문의 자동 커튼이 밑에서부터 위로 움직여 외부의 빛을 차단한다. 기념품을 파는 공간, 카페, 모두 크지 않지만 전문가의 솜씨로 세심하고 꼼꼼하게 신경을 쓴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런공간, 지블리 박물관은 '미타카시'의 보석이다.

일본 미타카시에서 간송박물관이 생각나다

지난 봄, 서울 성북동의 간송박물관에서 봤던 ‘대겸제전’이 생각났다. 겸제 정선 선생의 진경산수, 현대의 어느 수채화보다도 맑게 다가왔던 기억들이 새롭다. 박물관의 정문을 들어서면 귀엽고도 의젓하게 맞아주던 암컷과 수컷의 한국 호랑이 생각도 난다. 안방에 호랑이 그림을 걸어 놓으면 잡귀가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 해서 호랑이 민화는 대단히 인기 있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간송박물관에는 아예 살아 있는 듯한 돌 한국 호랑이 두 마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앉아 있었다.

지블리 박물관을 보면서 나는 왜 간송 박물관이 떠올랐을까. 알 수가 없다. 지블리는 현대의 것이고 간송은 고대의 그것이다. 지블리 박물관을 보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좋은 공간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새삼 부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약 45리터의 배낭 아랫부분 절반은 옷, 윗부분 절반은 5박6일의 전리품과도 같은 몇 권의 책과 삼, 사십장의 음악CD로 채워진다. 20년을 넘게 모아 지금은 음반이 7000장이 조금 넘는다. 혹시 세월이 지나고 내 아이가 고물상에 헐값에 판다 해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리 넉넉히 살지는 못했지만, 좋아하는 음악은 곁에 두고 닳도록 들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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